[독립운동가]죽산 조봉암 선생
- 최초 등록일
- 2006.09.15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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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2공화국의 민주화 탄압과 조봉암의 정치적 노력의 의의에 대해서 조사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해방 후에서 단정수립까지
2) 진보당의 결성
3) 제 2 공화국의 민주화 탄압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1959년 7월 31일 죽산 조봉암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가 갇혔던 곳에서 62세에 죽음을 맞게 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2. 본론
1) 해방 후에서 단정수립까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1년간 투옥 된 뒤, 21년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동경에 건너간 조봉암은 그 곳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을 만나고 사회주의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인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요, 공산주의였다. 그것은 그가 46년에 이전까지 걷고 있던 좌익의 노선과 결별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박헌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박헌영이 극단적인 좌익을 추구하며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보낸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사신이 미군방첩대에 의해 공개가 되면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좌익에서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봉암이 우익으로 전향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미, 소 공위 이 후에 이승만의 정읍발언 등, 우익도 마찬가지로 극우화 해가는 과정에서 조봉암은 이대로 좌익과 우익이 나뉘어서 북쪽과 남쪽에 두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노동자의 독재, 자본가의 전제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해방 후 남, 북을 각각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고 있는 당시의 현실에서 남북을 통합하는 정부를 수립하는 길은 친미, 친소도 아니고 순수 자본주의, 순수 공산주의체제의 국가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제 3의 길에 대한 생각은 이 후, 그의 정치적 노선과도 계속 연계되어 나타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