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성경의 이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최초 등록일
- 2006.08.16
- 최종 저작일
- 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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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출 애 굽 기
제 1 장. 개 요
제 2 장. 본문내용
Ⅱ. 레 위 기
제 1 장. 개 요
제 2 장. 본문내용
제 3 장. 메시지
제 4 장. 나의 고백
Ⅲ. 민 수 기
제 1 장. 개 요
제 2 장. 본문내용
제 3 장. 메세지
제 4 장. 나의 고백
Ⅳ. 신 명 기
제 1 장. 개 요
제 2 장. 본문내용
제 3 장. 메시지
제 4 장. 나의 고백
Ⅴ. 끝 맺 음
본문내용
제 1 장. 개 요
- 출애굽 사건은 구약의 구속사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족장들에게 주신 땅과 민족의 약속을 역사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수단이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기의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당시의 이집트 혹은 팔레스타인 근동의 문헌이나 역사에 출애굽의 기록이라든지, 모세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이집트의 역사를 개관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1. 출애굽의 역사적 배경
1) 이집트 제국의 발흥
주전 이천 년기 중기에 고대 근동 지역에는 새로운 나라들과 제국들이 줄을 이어 생겨나고 있었다. 후리족은 서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질러서 시리아 서부로부터 동쪽의 자그로스 산맥의 발치까지 뻗어 있었고, 미탄니의 서북쪽, 소아시아의 동부지대에는 히타이트인들이, 마탄니의 동쪽으로는 앗시리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심은 이제 막 힉소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집트에게로 옮겨지고 있었다.
18왕조의 창건자인 아흐모시스는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이집트를 암흑시대로부터 세계강국으로 부상할 제국시대로서의 출발을 시작하였고, 투트모시스 1세는 유브라테스 강까지 진출하였으나 초기 18왕조의 바로들은 주로 응징의 수단으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투트모시스 3세부터는 서서히 괄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집트의 국경을 절정으로 이끌어 올렸으며, 이집트 제국의 판도를 북쪽 알레포까지 확장시켰다. 그결과 메소포타미아 상부의 마탄니 왕국과 갈등을 유발하게되어 두 나라의 전쟁은 50년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되다가 투트모시스 4세때 조약 체결로 끝나게 되었다.
아텐의 숭배자이면서, 아텐의 유일한 신이라고 선포한 아메노피스 4세는 이집트의 초;고신인 아문의 제사장들과 공공연하게 충돌하게 되자,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이라고 바꾸고 수도를 테베에서 중부지역인 아케나텐으로 옮겼다. 이 곳에서 1887년 아마르나 서신들이 발견되어 당시의 역사와 사회을 알게하였고, 팔레스타인에 상주 행정관을 가진 행정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2) 이집트-히타이트 전쟁
아메노피스 4세, 즉 아케나텐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종교개혁을 돕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군대를 소환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세운 왕국을 소홀히 함으로 이집트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집트는 시리아 통치의 종말을 고했다.
숩필룰리우마는 히타이트의 보좌를 차지하고 시리아에 제국을 형성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후리족의 왕국을 완전히 굴복시켰으며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어 이집트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한편 앗시리아는 몰락하는 후리족의 도시들에 끔찍한 보복을 감행하며 서서히 부흥하게 되고 서쪽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18왕조가 힘을 잃게 되고 아시아에 대한 이집트의 통제력은 상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히타이트도 아직 시리아에 자신들의 세력을 완전히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앗시리아의 진출로 이집트에 신경을 기울일 틈이 없었으므로 이집트는 제 19왕조에 바로들하에서 서서히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그랜드 종합주석(제자원, 성서교재주식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