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탐방기)수원화성 문화유산 답사기
- 최초 등록일
- 2006.08.02
- 최종 저작일
- 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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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글은 수원화성 답사기입니다.
수원화성에 대한 유래, 역사적 배경지식과 건축학적, 사회적, 정치적 의의가 들어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느낀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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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수원화성은 한국 성곽의 꽃으로 불리며, 역대 한국 성곽의 장점만을 모은 조선 성곽 건축의 정점이자 완성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수원을 일컬어 효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며, 더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의 가치와 멋이 있다. 이런 화성을 이해하려면 정조에 관해서 알아야만 한다.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에서 20년(1974~1796)사이에 축조되었다. 정조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즉, 영조의 손자이다. 1724년에 즉위한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이 극심하던 때에 각 정파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인 탕평책을 구사하여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749년 영조의 건강상의 문제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각 당파들이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 들었으며, 게다가 노론은 영조와 세자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간질을 했다. 이에 영조는 세자를 불신하게 되었고 세자 또한 비행을 서슴지 않았다. 나경언이 세자 비행 10조목을 아뢰자 영조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결국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도세자 사건이다.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본 효자였던 정조의 나이는 당시 11살이었는데,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정조는 아버지에 대해 슬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른 정조는 즉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묘를 화산(지금의 융건릉과 용주사 부근)으로 옮겼다. 이를 위해 팔달산 밑에 화성 행궁을 짓고 거기다가 화성 성곽을 쌓은 것이 화성의 시초가 되었다. 정조가 화성이라고 이름 짓은 까닭은 덕과 효를 펼치는 아름다운 도시가 되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짐작하여 아버지와 화성에 대한 애착이 얼마만큼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화성 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도인 동시에 기존의 정치를 벗어나 신정치·개혁정수를 완수하기 위한 것도 있다. 정조는 기존의 가문 중심이 아닌 철저한 능력과 학식 중심의 인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성 완공 4년 후인 1800년에 급서하고 만다. 이로서 세도정치가 등장하고 정조가 키운 개혁인사·실학·사상가들이 모두 권력에서 제거 당했으며, 화성을 통한 정조의 개혁정치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만 것이다. 여기다가 화성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실학사상이다. 선진해외문물을 수입하여 기존 성곽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성곽시설을 만들었다. 웅성, 오성지, 적대, 공심돈, 포루, 치성 등이 이러한 것들의 예이다. 시설뿐만 아니라 공사 기법에도 실학이 영향을 미쳤다. 거중기, 수레와 유형거의 도입으로 막대한 노동력 감축과 완공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단순한 서양문물의 흡수가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 제작,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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