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명말 청초 시기의 민변(民變)과 노변(奴變)
- 최초 등록일
- 2006.07.31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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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사의 격변기 명말-청초의 사회상과 이 시기 발생한 민변과 노변 등에 대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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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정치적 상황
1. 환관의 전횡과 광세(鑛稅)의 화
2. 당쟁과 동림(東林)․복사(復社)운동
Ⅲ. 사회․경제적 상황
1. 이갑제질서(里甲制秩序)의 해체
2. 인구의 이동과 도시의 발달
3. 상업생산의 전개와 그 영향
Ⅳ. 명말 청초의 민변(民變)
1. 명말 청초의 도시와 시민, 그리고 민변
2. 명말 청초 민변의 전개와 의의
Ⅴ. 명말 청초의 노변(奴變)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명대중기 이래 상품생산과 화폐경제의 전개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시켰다. 몰락한 농민의 토지는 지주에 의해 겸병되어 갔고 토지가 소수 지주층에 의해 점유되는 심각한 토지집중현상이 중국사에 다시 나타나게 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게 되었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은 전호(佃戶)가 되어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또는 스스로의 몸을 팔아 노복(奴僕)으로 전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조의 통치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유민(流民)이 되어 향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명말 청초 시기에는 수많은 민변과 노변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부터 명말 청초의 시대적 상황과 당시의 민변과 노변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Ⅱ. 정치적 상황
1. 환관의 전횡과 광세(鑛稅)의 화
(1) 환관의 전횡
명대 환관의 정치 관여는 성조 영락제(永樂帝) 때부터 시작되었다. 영락제는 정난(靖難)의 난 때 환관의 협조를 얻어 용이하게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의 유지를 깨뜨리고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으며 황제의 수족으로 부리기 시작한다. 이에 환관들은 황제의 특명을 받아 군대를 감시하고 관료들의 비행을 살피고 지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또 영락제는 영락 8년(1420)에 황제 직속의 동집사창(東緝事廠)을 신설하여 전국의 모든 관민을 감시케 하고 그 책임자를 환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환관의 위세가 더욱 높아졌다.
이후 영종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더욱 두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사례감의 환관 왕진(王 振)은 영종이 태자였을 때 시중을 들어 영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영종이 친정을 행하자 반대파를 거세한 후 정부의 요직에 자신의 인물들을 앉혀 사당(私黨)을 조직하였고 군사 분야에 간여하였다. 당시 동부의 타탈와 서부의 오이라트가 세력을 형성에 명의 북변에 침입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왕진은 영종을 부추겨 북벌을 감행하게 되고 그의 무모한 작전으로 영종은 몽골군의 포로가 되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의 수치를 당하게 된다.
왕진의 사후에도 환관들의 세력은 쇠퇴하지 않았고, 환관의 전횡은 무종(武宗), 광종(光宗), 희종(熹宗)의 시대를 거쳐 명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 환관들은 정부의 모든 관리들을 감시하고 비리가 있는 관리는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자까지 모두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으므로 그 악명이 하늘을 덮었는데, 이 같은 환관들의 득세와 전횡은 명 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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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Ⅳ』, 지식산업사, 2000
중국사연구실, 『중국역사 下』, 신서원, 1993
박원호, 「明末靑初의 民變과 妖賊 ․ 流寇」, 역사학연구회, 2004
이춘식, 『중국사서설』, 교보문고,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