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구려의 신라 백제 정벌
- 최초 등록일
- 2006.07.02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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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의 신라 백제 정벌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잘 이용해 외교하였기에 대체로 고구려와 백제
위주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 중앙 집권을 이루었기 때문에 삼국은
고구려, 백제가 핵심 세력 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첫 대립이 시작된 고국원왕부터 고구려가 더이상 정복국가로의
모습을 못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안원왕까지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나열했습니다.
목차
시대별로 본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
1. 고국원왕
2. 소수림왕
3. 고국양왕
4. 광개토대왕
5. 장수왕
6. 문자명왕
7. 안자왕
8. 안원왕
본문내용
4)광개토대왕
광개토제가 즉위할 무렵 국제정세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진이 멸망한 이후 성립된 후진, 후연, 서진, 후량등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남방의 맹주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며 신진세력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한반도에서는 산동지역을 차지하여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백제가 가야와 왜 등을 끌어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고 신라는 강성해진 고구려에 조공하여 백제의 연합세력을 경계하려 하였다.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광개토대왕은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팽창정책을 먼저 감지한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당시 백제가 주도하는 한반도 및 일본열도의 국제관계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신라조정은 일본 열도내의 몇몇 소국들과 마찰로 인해 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열세에 있었다. 이 때문에 신라는 백제와 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에 압박을 가하고 있던 고구려에 화친조약을 제의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고구려는 한반도 지리에 익숙한 신라와의 화친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여 392년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되자 백제, 왜, 가야등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침략할 기세를 보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는 화친조약에 따라 392년 백제의 진평군 일대를 공격하였다. 하북의 진평군으로 밀려든 고구려의 군사는 백제의 10개 성을 함락시킨 후 주둔군을 남겨두고 다시 북진하여 거란을 정리하고 다시 남진하여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요새중의 요새로 진평에 머무르던 백제군의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이곳이 무너지자 백제는 진평군을 상실하고 하수(황하)남쪽으로 완전히 밀려놨다. 이 관미성전투에서 패배한 백제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고 주장하였고 이에 진사왕이 방관만 하자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이 그를 사냥터에서 제거한 후 왕위에 올라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수성전에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였고 그 후에도 몇차레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에 광개도대제는 대륙의 백제 기지는 더 이상 그들의 평양성을 넘볼수 없다고 판단하여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궁성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 396년 대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향했다. 이에 당황한 백제군은 도성에서 수성전을 펼쳤으나 막아내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아신왕은 화친을 제의했고 광개토제는 아신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였다. 아신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을 서약하고 신하의 예를 갖췄다. 이처럼 백제 원정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그곳에 부수도인 하평양을 건설하여 한반도 정책의 교두보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백제의 아신왕은 영토회복을 위해 군대를 증강하는 한편, 397년 태자 전지를 왜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