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신라 6세기의 금석문 자료의 검토
- 최초 등록일
- 2006.06.21
- 최종 저작일
- 2006.05
- 1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6세기 신라에서는 많은 금석문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 5개 정도 발견경위 내용등을 자세하게 써 놨습니다
목차
Ⅰ. 서론
II. 본론
1. 6세기 신라 금석문의 특징
2. 6세기의 여러 신라 금석문
1)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理新羅碑)
2)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3)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4) 울산천전리서(각)석(蔚山川前理書石)
5)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1)창녕비(昌寧碑)
(2)북한산비(北漢山碑)
(3)황초령비(黃草領碑)
(4)마운령비(摩雲領碑)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신라에게 있어 6세기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싹트고 그 뿌리를 내려 신라적인 전형이 갖추어져 가는 시기였다. 이를 테면 법흥왕대에 이르러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공인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 하는 등의 커다란 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6세기 신라는 정치와 사회와 사상 면에서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때에 성립된 지배 체제를 한마디로 중앙 집권적인 귀족국가로 표현하여 그 전과 구별 짓는다. 즉, 신라사에 있어 6세기는 자체 내부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은 시기였던 것이다.
이렇듯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사상 새로운 전기를 맞으면서, 문자 기록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전례없는 수많은 금석문이 유달리 많이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시기에 한문자(漢文字) 사용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는 사정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6세기가 특이하게도 다른 시기에 비하여 많은 금석문이 작성된 시기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금석문이 20여점 이상을 헤아린다. 그래서 어쩌면 6세기를 금석문의 세기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부터 아래에서는 금석문의 세기인 6세기의 신라 금석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6세기의 20여점의 금석문 중 추려서 영일냉수신라비, 울진봉평신라비, 단양신라적성비, 울산천천리서석(울산천천리각석), 진흥왕순수비 이렇게 5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6세기 신라 금석문의 특징
금석문은 금속이나 돌 등에 새긴 글씨나 그림으로 보통 청동기나 석비 등에 새겨진 명문을 뜻하나 넓은 의미로는 갑골문·새인(璽印)·전폐문자(錢幣文字)·봉니(封泥)·목간(木簡)·죽간(竹簡) 등의 글씨까지 포함한다. 금석문은 영일냉수리신라비를 비롯하여 울산봉평신라비, 울산천천리서석, 영천청제비, 단양신라적성비, 진흥왕순수비(마운령비, 황초령비, 북한산비, 창녕비), 대구무술오작비, 임신서기석 등 20점이 넘게 있다. 이런 금석문을 분류하는 기준이나 방법은 다양하지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6세기 금석문에 대한 특징적인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참고 자료
《금석문과 신라사》, 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신라 진흥왕 순수비 연구》, 노용필, 일조각, 1996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 푸른역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