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상수도 및 서울시 정수사업소
- 최초 등록일
- 2006.06.09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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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 상수도 및 서울시 정수사업소의 역할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
목차
1. 상수도 개요
2. 상수도 역사
3. 정수처리, 정수시설개요
4. 우리나라 정수처리 기술
5. 뚝도정수사업소 및 강북정수사업소 현황
본문내용
⚀ 상수도의 개요
상수도는 음료·위생·방화 등을 위해 계통적으로 수돗물을 보내는 설비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도시·촌락의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공급하는 시설의 총체를 지칭한다.
이러한 상수도 공급을 위해서는 크게 필요한 물을 원수에서 모으는 취수시설, 수요지까지 운반하는 송수시설, 수질을 개량하고 정화하는 정수시설, 필요한 수압과 수량으로 시가지로 수송하여 수요자의 거주지 근처까지 배수하는 배수시설, 사용자의 부지 안이나 건물 안의 수도꼭지까지 배관하는 급수장치로 이루어진다.
⚁ 상수도의 역사
하천, 용천 또는 우물 근처에 거주할 수 없는 경우나, 취락이 커져서 오염을 피할 수 없게 되거나 수량이 부족해진 경우에 취락까지 맑은 물을 끌어오는 시설을 공동으로 설치한 것이 수도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에는 지하수로를 통해 도시 안의 우물까지 물을 끌어들인 유구가 있었으며, 고대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에도 수십㎞나 떨어진 하천이나 샘에서 대량의 물을 끌어들이던 수도가 축조되어 있었을 만큼 상수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근대적 상수도 시설은 18세기 유럽에서 냇물을 모래로 걸러 급수했던 지역에서 전염병 환자(장티푸스, 콜레라) 발생이 적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세기 중엽에는 모래로 여과한 물을 철관을 통해서 공급하게 되면서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고대 수도는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상하수도관과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배수로와 배수암거의 잔형에서 당시 통일신라에도 수도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상수도라 불릴만한 뚜렷한 시설을 보이지 못하다가 조선 말기 개항 전후로 하여 근대적 상수도시설이 도입되었다.
서울·부산·인천·목포 등의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자 물 부족과, 수인성 전염병의 증가에 따라 상수도 시설의 필요성이 인식되던 중 1903년 미국인 콜브란과 영국인 보스토윅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상수도부설경영의 특허를 받고, 영국인 회사인 조선수도회사가 이 특허권을 양도받아 1906년 8월 뚝도수원지공사를 시작하게 되어 1908년 완공되어 서울시에 수도를 공급하게 되면서, 한국상수도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수도사업은 부산·인천·평양·대구 등의 도시로 확대되어나 갔다.
한일합병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수도사업을 관장하였으며, 점진적으로 진행된 수도사업의 결과 해방 당시 수도보급현황은 급수도시 총 83개소, 급수인구 약 20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인구의 도시집중현상과 6·25전쟁으로 전국 40여 개 도시의 수도시설이 파괴됨으로써 급수부족 문제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부터 국제원조로 급수시설의 복구·확장·신설공사가 진행되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급수보급률이 22%로 확대되었다. 그 후 꾸준히 추진된 수도사업으로 급수보급률은 계속 증가해 1971년에는 36%, 1976년에는 50%, 1981년에는 57%를 나타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