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삼국간섭과 을미사변
- 최초 등록일
- 2006.05.24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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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일전쟁후 일본의 태도 와, 일본의 주도권으로 조선을 장악하러 하자
이를 견제 하기 위해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주도권을 다시 되찾기위해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이런 내용으로 기술하여 보았다. 큰 타이틀 삼국간섭과 그에대한 역사적 인식 및
을미사변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담았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ⅰ. 삼국간섭
(1) 삼국간섭의 배경
(2) 삼국간섭
(3) 삼국간섭의 영향
ⅱ. 을미사변
(1) 역사적 배경과 과정
(2) 이후의 정황과 영향
Ⅲ. 결론
본문내용
2. 본론
ⅰ. 삼국간섭
(1) 삼국간섭의 배경
198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조선정부는 예상외의 농민군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청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은 이틀 뒤에 청국에 대해 전쟁을 도발하였다. 청국의 공동철병 안을 거절하고 조선 정부에 무력을 전제한 내정간섭을 한 것이다. 1여년에 걸친 청일전쟁(1894-1895)에서 결국 승리한 일본은 청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한다.
둘째, 청국은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을 승인한다.
셋째, 청국은 배상금 2억냥(일본화폐 약 3억엔)을 지불하는 것에 동의한다.
넷째, 종래부터 구미 각국이 가지고 있던 통상특권을 일본에게도 부여한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였고, 요동반도를 획득하여 대륙침략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으며, 대만을 점유하여 비백인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식민지를 영유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을 갖추었다.
(2) 삼국간섭
1800년대 중, 후반부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전까지 서양열강들의 조선침탈은 굉장히 심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러, 프, 독이었다. 특히 동진 남하정책을 통해 부동항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었던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청일간의 강화조약의 내용을 좌시할 수 만은 없었다. 요동지방은 남만주 바다에의 출구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조선을 둘러싼 양국 간의 패권다툼으로 받아들여 방관 혹은 소극적 정책을 취하였지만 전쟁의 뒤처리가 조선에 국한되지 않고 요동반도까지 확산되자, 적극 정책으로 전환하여 개입하였고 독일과 프랑스를 설득하여 4월 23일 3국의 주일공사를 통해 일본의 외무성에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의 수도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 이라며 요동반도 환부를 권고하는 내용의 외교각서를 교부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국간섭니다.
일본은 이 굴욕적 요구를 거절하기에는 아직 국력이 부족하여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을 상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5월 5일 요동반도의 회답서를 삼국의 공사에 전달하고 1895년 5월 10일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면서 삼국 간섭은 종결되었다.
참고 자료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판천, 이민원, 국학자료원, 2002
대한제국의 비극(한말 외국인 기록 2), F.A 매켄지, 집문당,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