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가]윤선도론
- 최초 등록일
- 2006.05.08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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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산 윤선도는 조선 한시, 시가문학의 한 축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조 75수와 한시 259수에는 그의 세련된 기교와 각고면려한 시인적 자세까지 가미되어 조선조의 마지막이자 제일의 시조시인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윤선도의 생애, 특히 그의 오랜 유배생활과 관련하여 윤선도의 시에서 나타나는 연군지정과 이념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윤선도의 생애
Ⅲ. 자연과 고산
Ⅳ. 나오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고산 윤선도는 조선 한시, 시가문학의 한 축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조 75수와 한시 259수에는 그의 세련된 기교와 각고면려한 시인적 자세까지 가미되어 조선조의 마지막이자 제일의 시조시인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윤선도의 생애, 특히 그의 오랜 유배생활과 관련하여 윤선도의 시에서 나타나는 연군지정과 이념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Ⅱ. 윤선도의 생애
작가를 연구함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와 작품과의 연관성은 빠질 수 없다. 특히 윤선도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윤선도의 20여년이나 되는 유배생활과 그의 작품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에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5수와 「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참고 자료
정운채, 『윤선도』,건국대학교 출판부,1995,p.110 재인용.
문영오, 「윤선도론」,『고시조작가론』,백산,1986,p.370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