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10월 유신
- 최초 등록일
- 2006.04.18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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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0월 유신과 반독재투쟁 내용정리 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래요 ^^
목차
Ⅰ.장기집권을 꿈꾼 박정희
2. 10월 유신으로 인한 헌정 중단 사태
3. 민주주의를 꿈꾼 투쟁
4. 박정희 정권의 최후
본문내용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각계 각층의 분노와 항쟁은 끊이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의 제 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여당이던 공화당보다 1%앞섰다.
1979년 3월 1일 재야인사들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하고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였다. 그에 이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언, 시위와 데모, 기도회가 끊이지 않았다.
신민당은 `정권타도투쟁`을 선언하고, 대중의 생존권 요구 및 재야 세력의 민주화 투쟁과 결합하여 광범위한 반독재 민주연합의 형성에 나섰다.
1979년 9월 16일자 뉴욕타임지와의 회견에서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카터 미행정부는 소수 독재자인 박정권에 대한지지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에 공화당과 유정회는 ‘사대주의’, ‘반국가적 언동’으로 규정하고 김총재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하는 징계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여당 단독으로 10월 4일 제명했다. 이에 야당은 국회 등원거부 및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YH사건, 김영삼총재 제명, 야당의원의 등원거부 및 의원직 사퇴로 정국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국민대중도 정국과 유신체제에 혐오감과 분노로 변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대학생들의 가두시위는 유신철폐, 독재타도로 변했다. 1979년 9월 16일 부산대학생들의 반유신 데모, 18일 마산의 경남대생들의 시작으로 진행된 시위는 수 만명으로 불어났으며, 19일 마산에서의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며, 공화당사, 방송국, 파출소 등이 습격되고 방화되었다. 박정권은 부마항쟁을 강경 진압하였다. 18일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마산, 창원에 위수령 선포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항쟁을 진압하였다. 부마항쟁의 의미와 성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들의 선도투쟁으로 시작하여 실업자, 도시빈민, 노동자 등 각층의 시민이 참여한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유신정권이래 사회적 모순의 응축된 폭발이었다. 셋째, 유신체제의 긴급조치와 탄압 등 폭압적 상황에서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항쟁이었다. 부마사태로 확산된 반체제운동에 자극을 받아 권력중추부의 알력이 격화되고, 그 여파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 의하여 시해됨으로써 유신체제는 물론 18년 간의 박정희 시대는 역사의 장으로 마감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