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순자의 사상과 철학
- 최초 등록일
- 2006.01.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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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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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순자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2. 순자의 인간관
3. 순자의 철학사상
(1) 정명론
(2) 성악설
(3) 예론
(4) 비십이자편
4. 맹자와 순자의 사상 비교분석
5. 순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
본문내용
순자(荀子)의 생애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정확한 것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그 출생연대에 대해서도 주(周)나라 현왕(顯王) 30년(B.C.339) 이전이라는 설로부터 주나라 난왕 2,3년경(B.C.313,312)이라고 하는 설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형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은 가장 믿을 만한 자료라고 볼 수 있는 「사기」의 맹자. 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의 기술이 애매하고 간략하기 때문이며, 또한 연대 결정의 기준이 되는 순자가 제(齊)나라로 유학한 연령과 연대마저 "나이 50에 처음으로 와서 제에 유학함" "전병지속개이사제양왕시이순경최위로사(田騈之屬皆已死齊襄王時而荀卿最爲老師)"라고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03-221년) 중엽에 조나라에서 태어난 순자[성은 순(荀), 이름은 황(況)] 는 50세쯤에 처음으로 대국인 제나라에 유학했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학하기 이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가 않고 있으나, 태어나서 50년 가까이를 살아온 조나라의 정치나 문화가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의 조나라는 호복(胡服). 기사(騎射)의 제도를 채용하여 부국강병을 실현, 영토 확장에 매진한 무령왕(武靈王)과 그 아들 혜문왕(惠文王)의 치세였다.
구습에 구애받지 않고 실리가 있다면 이적(夷狄)의 풍습과 제도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착실히 하나하나 성과를 올리고 있던 빛나는 개명군주(開明君主)인 무령왕의 모습이 젊은 시절의 순자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만 겨우 이 무령왕을 사구궁(沙丘宮)에서 아사(餓死)하도록 한 조나라의 봉양군(奉陽君)에 대한 `찬신(簒臣)`이라는 평가에서 그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무령왕 . 혜문왕 시대의 대외 관계와 순자가 찾아가는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국가 형편을 일별해 둘 필요가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국시대 말기에는 중원의 여러 나라와 제나라와의 합종(合縱)이나 진나라의 연형(連衡)등 어지러운 일합일리(一合一離)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조나라도 또한 예외없이 제와 진나라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자국의 보호와 세력 확장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고 자료
김교빈. 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녘
이택후. 김형종, 중국현대사상의 굴절, 지식산업사
김철호, 동양철학 이야기 주머니, 녹두
馮友蘭,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