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도사서원과 퇴계이황
- 최초 등록일
- 2006.01.03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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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산서원 위주로 적은 글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⑴계상서당
⑵이황 시대의 건물
①도산서당
②농운정사
③역락서재
⑶도산서원
⑷서원문화
3.결론
본문내용
이황이 죽은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의 뒤편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의 사액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 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574년에 서원이 건립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교당’과 ‘상덕사’의 건립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상덕사’는 현재 도사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니 ‘도산서당’의 시대가 가고, ‘도산서원’의 시대가 열렸을 때, 건물배치 구도에도 대변혁이 일어나는 셈이다. 이황의 시대에는 수평이 추구되었던 건물배치 구도가, 이황 사후 진행된 서원 건립의 역사 속에서는 수직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무엇보다도 선현에 대한 예배처 기능을 갖는 ‘상덕사’가 다른 건물들보다 위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도산서원’ 입구에서 ‘전교당’에 이르는 길은 필요 이상으로 높이가 추구된 것임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지배하는 것은 소박ㆍ단순ㆍ자연을 특징으로 하는 미학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아무 장식도 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실용을 위하여 갖추어진 공간일 따름이다. 그러나 전교당 주변을 지배하는 미학은 그것과 다르다. ‘장중’, ‘엄숙’, ‘조화’ 등을 추구하는 미학이 거기에서는 발견되는 것이다.
‘진도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각의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그 공간은 ‘전교당’과 ‘동재ㆍ서재’, 그리고 양쪽의 광명실로 둘러싸여 있다. ‘진도문’ 양쪽으로 벌려 서 있는 ‘동 광명실’과 ‘서 광명실’의 이 두 채의 ‘광명실’은 ‘도산서원’에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동재’는 ‘박약재’이다.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약재’의 박약‘은 ’박문약례‘의 준말이다. ’널리 공부를 하여 예의로 묶어내라‘는 뜻이다. 앞부분은 학문하는 데서의 넓이를 말하고, 뒷부분은 학문하는 데서의 깊이를 말하는 셈이다. ’서재‘는 ’홍의재‘이다. ’홍의‘란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음‘을 의미한다. 몸 공부, 마음 공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재’와 ‘서재’는 ‘도산서당’ 시절의 ‘농운정사’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농운정사’에 비해서는 공간도, 규모도 훨씬 넓고 크다. ‘동재’와 ‘서재’를 합한다면 20여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하다. ‘박약재’의 북동쪽에는 ‘장판각’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