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한상룡
- 최초 등록일
- 2005.12.20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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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 중 한상룡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많은 도움 되실겁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 론
1. 인물 소개
2. 주요 친일 행적
3. 친일관련 문서 (“조선의 사상문제와 산업”
“승패를 결정하는 해”를 통해...)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한상룡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기에 시작하여 식민지 자본주의가 확립되기까지 40여 년 동안 재계와 실업계를 대표한 중심인물이었다. 이 당시 그의 모든 활동은 동족인 조선 민중을 수탈하고, 일제 자본의 지속적인 이익을 보장하며 제국주의 전쟁과 침략을 방조하는 것이었다. 그의 역할은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 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였다. 그는 일제식민지하에서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리 울 정도로 탁월한 경영 능력을 보이지만, 이 활동의 내재한 동기는 민족과 국가는 인식하지 않는, 오로지 일본에 대한 철저한 예속과 굴종을 통한 식민지배 체제의 강화였다. 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상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으로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 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로 평가했다.
여기서는 한상룡이 어떻게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으로 활동했는지에 대해 “조선의 사상문제와 산업”이라는 문서와 친일행적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 론
1. 인물 소개
한상룡(韓相龍, 1880~1947)
- 1903년 한성은행 총무, 1925년 경성상업회의소 부회두
- 1937년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
한상룡은 1880년에 규장각부제학 출신 한관수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국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고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成城] 학교에 입학했다. 병으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1901년 중교의숙 (中橋義塾)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1902년 구한국 외부 참서관(參書官), 평식원 총무과장(平式院總務課長), 일본보빙대사(日本報聘大使) 수행원, 궁내부 비서감승(秘書監丞)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고 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로서 근대 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구사능력을 갖춘 인제였던 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 두 외숙(이운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3년 한성은행 설립위원으로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 총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 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8년 동양척식 주식회사 창립이사 겸 조사부장이 되었고 1916년 고문이 되었다.
참고 자료
1. 반민족연구소 엮음,「친일파99인」, 돌베개, 1993
2. 역사문제 연구소 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2003
3. 김완섭 저, 「친일파를 위한 변명」, 문예춘추, 2002
4. 정운형 저,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5. 임종국 저, 「일제침략과 친일파」, 靑史, 1982
6. 김명수 저, 「한말·일제하 한상룡의 기업활동과 정치경제 인식」, 연세대 대학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