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교육]청계천 현장학습 안내장, 계획서 및 현장학습지
- 최초 등록일
- 2005.12.19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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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장학습의 안내장, 계획서, 정산안내장, 현장학습지를
작성하였습니다.
청계천 현장학습을 예로 하여 만든 자료입니다.
목차
Ⅰ. 현장학습 안내장
Ⅱ. 현장학습 계획서
Ⅲ. 현장학습 정산 안내장
Ⅳ. 현 장 학 습 지
1. 청계천의 정의
2. 청계천의 역사
3. 청계천의 유적
4. 청계천의 공사 일지
본문내용
1. 청계천의 정의
청계천은 서울의 서북쪽 북악산, 인왕산 사이에서 발원돼 종로구, 중구 사이 서울 도심을 서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다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랑천과 합쳐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하천이다.
길이 3.6㎞, 최대 너비 84m로 종로구·중구의 경계를 흐른다.
2. 청계천의 역사
① 청계천의 탄생
청계천의 조선시대 본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개천은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개천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 때 물이 넘치면 가옥 침수, 다리가 유실, 익사자가 발생 등이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개천 정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태종은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세종은 지천과 작은 세천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세종은 도성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쓰레기 배출하기 위한 생활하천으로 개천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개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② 영조 개천을 치다
태종, 세종 때의 개천은 도성 인구 10만정도가 쏟아내는 하수 처리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7·8세기, 임진·병자의 전란을 겪자 많은 유민이 도성으로 몰려 서울 인구가 급증하였고, 개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하수가 늘어났다. 또한 폭우, 우박, 눈 등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나무를 마구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고, 도성 주변의 산들은 민둥산이 되어 비가 조금만 와도 토사가 쓸려 내려 개천을 메워 영조가 즉위한 때에는 하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영조는 1760년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개천에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1773년 영조는 물자, 인력 부족으로 시행하지 못했던 개천 양안 석축을 위해 개천 정비를 위한 공역을 다시 실시하였다. 양쪽 제방에 돌을 튼튼히 쌓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준천은 시작한 지 2개월 후에 완성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