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사]비인체제 동요의 원인과 과정
- 최초 등록일
- 2005.12.16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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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성립된 비인 체제는 보수 반동 체제로서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억압하였다. 그러나 먼로주의와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그리스 독립전쟁에 의해 반동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통해 완전히 붕괴되는 과정을 살펴 보려한다
목차
1.서론
2.비인체제
1)비인체제의 성립
2)비인체제의 동요
i)먼로주의
ii)그리스 독립전쟁
3.비인체제의 붕괴
i)7월 혁명
ii)2월 혁명
3.결론
본문내용
1. 비인체제의 성립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1814-1815년에 비인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통해 유럽에는 이른바 `신성한 정통성의 원리`에 입각한 보수적인 `비인 체제`가 수립되었다.
비인체제의 골격을 이룬 것은 1814년 쇼몽조약에서 성립한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4국동맹, 15년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3군주(君主)가 체결한 신성동맹(神聖同盟) 등이었다. 이는 혁명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유지하여 강대국의 협조를 도모하는 복고적(復古的) 성격의 것이었다.
빈회의는 프랑스혁명 직전의 군주의 지배를 정당하다고 보는 정당주의와 대국간의 세력균형의 원칙에 의하여 유럽의 영토관계를 구획하고 구지배자를 부활시켰다. 보수적·복고적인 이 체제는 독일·이탈리아를 분열상태로 머물게 하고, 여러 소국의 이해(利害)에 대한 고려가 적을 뿐더러, 각국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체제였다.
즉, 빈체제는 빈회의에서 나폴레옹의 엘바섬 추방 후인 1814년 5월에 체결된 강화조약(제1차 파리조약)에 의하여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의 처분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성립되었다. 그러나 전유럽에 걸친 전쟁을 수습하기 위한 이 회의의 과제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고, 또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지도적 정치가가 모인 대회였기 때문에, 실제상의 강화회의라 해도 무방했다.
회의의 발안자(發案者)는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이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국 대표의 접대에 거액을 투자하였다. 크고 작은 90개의 왕국과 53공국(公國)의 군주, 정치가들이 참가하였으나, 실제에는 대부분의 의사(議事)가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4대국과 프랑스와의 5개국 위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프랑스는 비록 패전국이긴 하였지만, 대표위원인 C.M.탈레랑 페리고르의 책동에 의하여 4개국과 똑같은 지위를 얻었다.
그 밖에 에스파냐·포르투갈·스웨덴 등을 추가하여 8국 위원회, 그리고 문제의 관계국에 의한 위원회가 열렸으나, 참가국 전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전체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폴란드와 작센의 처분문제로 의사진행이 지지부진한 데다, 메테르니히는 회의가 난관에 부딪치면 향연과 무도회를 베풀어 국면의 타개만을 도모하였으므로 각국의 군주들은 사교(社交)에만 열중하여, “회의는 춤을 추나 회의 진척은 없다”라고 비평받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