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 지방사
조운과 봉수에 관한 조사
목차
-조운
-조운과 관련된 옛 기록(택리지 중 발췌)
-봉수
-경남의 봉수
-그외의 봉수대
본문내용
◇ 조운
조선은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교통․통신 시설을 마련했는데, 그결과 역원제․조운제․봉수제가 정비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설치된 역(驛)은 중앙과 지방관아 사이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수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왕래에 따른 숙박편의 등을 제공했다. 따라서 역은 통신․숙박․교통의 기능을 두루 수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를 유지하는 데 중추적 동맥 역할을 했다. 역은 대략 30리마다 설치되어 역마와 숙박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출장 관원이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징표는 마패(馬牌)였다. 그리고 일반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교통의 요지, 또는 인가가 적은 곳에 국가가 운영하는 원(院)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사사로이 운영하는 주막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물화의 운송조직으로는 조운제가 운영되었는데, 역원제가 주로 군사․행정의 통신수단으로 쓰였다면 조운제는 운송수단으로서 초기부터 주목되었다. 본래 조운이란 국가가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선박에 의해 중앙으로 운송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해안이나 강변에 조창(漕倉)을 설치했고, 조선과 조군을 구비했다. 그러나 국가가 직영하던 조운제는 부역제가 무너지면서 16세기 이래 사선(私船)이 세곡운송을 하는 선운업으로 대체되었다. 조선 후기에 규모가 큰 선운업자로는 경강선인(京江船人)이 유명했는데, 때로는 지토선(地土船)과 도감선(都監船)도 세곡운송에 참여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통신시설로서 봉수제가 운영되었는데,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서로 연락함으로써 각 지방 또는 국경에서의 비상사태를 알렸다. 신호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사용하여 용이하게 식별하도록 했고, 각 봉수대마다 10명 내외의 봉수군을 두었다. 신호 방식은 횃불 하나면 별일 없음을, 둘이면 적의 모습이 나타남을, 셋이면 적이 국경에 접근해옴을, 넷이면 적이 침공해옴을, 다섯이면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뜻했다.
참고 자료
근세조선전기의 봉수제 〈한국학논총〉 7․8 : 허선도, 국민대학교 사학과, 1985, 1986
조선시대 군사통신조직의 발달 〈한국사론〉 9 : 남도영,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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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수단의 관리(崔完基, 한국사 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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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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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화재대관-도지정편-(경상남도,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