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종묘와 사직의 역사와 기능
- 최초 등록일
- 2005.11.28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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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묘와 사직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사정리와 오늘에 주는 의미.
목차
1. 종묘의 의미와 기능.
2. 역사와 변천사
3. 종묘의 건축적 특성
(1)단순한 건축형태와 장엄한 공간구성
(2) 증축의 흔적
(3)세부건축물
4. 종묘제례
5. 오늘의 의미
본문내용
1. 종묘의 의미와 기능.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역대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왕조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의 으뜸가는 행사이자 통치 질서의 기본이었다. 종묘는 중국에서 비롯된 제도로, 왕조시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예제(禮制)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조는 종묘를 가장 중요한 제사 대상으로 삼았고 그 건축과 조경에도 궁궐에 버금가는 정성을 쏟았다.
이와 더불어, 사직단 역시 으뜸으로 여겨진 중요한 시설이었는데, ‘사(社’)는 땅의 신을 가리키며 ‘직(稷’)은 곡식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두 신께 제사 드리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땅과 곡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으로 그것이 곧 국가성립의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서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을 지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두 시설이 없고서는 왕조의 통치 질서가 설 수 없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종묘와 사직을 모시는 것은 조상숭배와 동시에 왕조의 통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통 유교사회에서 종묘와 사직은 국가나 조정 자체를 의미하며, 국가의 존망은 곧 `종묘 사직의 존폐`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2. 역사와 변천사
☞종묘는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이때, 궁을 중심으로 종묘는 왼쪽에, 사직을 오른쪽에 두는 것은 좌묘우사(左廟右稷)라 하여, 중국 고대의 예제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종묘는 궁의 동쪽에 세워졌다.
처음 준공된 종묘는 동당이실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 실만 따로 하여 여러 신위를 한 지붕 아래 함께 모심. 중국에서 후한대 이후에 나타난 변화. 이전에는 소목제라 하여 각 묘는 독립된 건물을 별도로 가졌음.
의 대실 7칸에 좌우 익실 2칸이 달린 정전과 공신당, 신문, 동문, 서문 외에 신주 향관청이 있는 규모였다. 당시, 5묘제를 채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5묘란 태조의 묘와, 재위 중인 국왕의 선대 4대 조상의 묘를 말한다. 그리하여 완공후 이곳에는 태조의 사대조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와 함께 각 부인의 신위가 봉안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