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학]가적운하의 개착과 그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5.11.08
- 최종 저작일
- 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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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적운하에 대한 자료는 매우 귀해서 저도 구하는데 꽤 힘들었습니다.
역사학, 지리학 전공자분들이 답사하실 때 이전수집자료로 매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태안반도의 취락형성과정을 같이 올립니다.
목차
가적운하의 개착과 그 영향
Ⅰ.가적운하
1. 서언
2. 가적운하 개착의 긴요성
1)가적운하의 지리적 경관과 필요성
2) 자연적 요인
3) 사회적 요인
3. 굴포개착의 발의, 실행, 결과
4. 굴포운하의 대안과 그 영향
1) 안면곶의 개척
2) 조창의 설치와 창촌락의 발달
3) 관방시설의 발달과 기능
5. 요약 및 결론
Ⅱ 태안반도 주변의 산촌
1. 서언
2. 고려시대의 취락
3. 조선시대(근대)의 취락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언
굴포운하는 서해안 태안반도에 만입하는 가로림만과 천수만으로 유입하는 흥인천을 연결하는 약 3Km에 달하는 지협을 통과하는 운하로 충남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어송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도내리의 경계에 있는 개석곡이다. 이 굴포운하는 가적운하라 불리는데 이는 가로림만의 “가”와 예전 천수만에서 더 들어간곳에 위치하여 운하의 시작부분 이였던 적돌만의 “적”을 따와서 가적운하라 불리우게 된것이다. 여기서 굴포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포구를 일컫는 것이 아니고 운하의 개착지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운하의 존재조차 의심할 정도지만 본 운하의 개착공사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약 팔백년전 고려조 중엽부터 시작하여 이조 후기까지 실로 오백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 현재에 살필 수 있는 바와 같이 운하의 흔적만 남기고 완성치는 못하였다.
가적운하 개척의 경우를 살펴보면 주가 되는 인간의 힘은 가능성을 내포한 자연에 대하여 너무나 미약하였다. 이 사업은 정부에서 누차 착수하였으나 조선시대 당시 조정의 사정과 미약한 힘으로서는 실현이 곤란하였고 운하공사의 해지반은 견석이라 개착이 곤란하였고, 일편 조류는 토사를 운반하여 공사를 방해하는 자연조건에 대하여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오백년을 통해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겨우 안면곶을 관통하여 안면도를 만들어 이 운하에 代用하였다.
2. 가적운하 개착의 긴요성
1)가적운하의 지리적 경관과 필요성
태안반도는 그 동쪽 경계인 가야산지에서 서쪽으로 뻗은 낮은 산지가 주축을 이루고 있고, 수많은 만입과 반도, 크고 작은 섬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선은 817Km나 이르는 복잡한 Rias식 해안을 이루고 있어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고 화물운송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러한 항로를 피하려면 굴포운하를 개착하는 외에 여타의 방법이 없었다. 이 운하의 거리는 불과 3Km로, 운하의 완성은 817Km의 우회를 불필요하게 하고 시간거리의 단축도 가져오게 된다.
참고 자료
이봉준, 1977, “태안반도의 산촌형성요인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노도양, 1968, “가적운하의 역사지리적 고찰”, 『서산군지』
김의원, 1981, “안흥량굴포(운하)개착과 기법연구” 『대한국토계획학회지』, 제16권, 제2호
이종영, 1966, “의경고: 수로의 개착과 그 위치”, 사학회지, 제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