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사]김천시의 경제형성
- 최초 등록일
- 2005.10.12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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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천시의 경제형성을 농업,공업,상업 중심에서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농업
1)일제시대의 농업
2)광복후의 농업
2.공업
3.상업
본문내용
우리나라 공업지대를 입지조건의 공통성, 집적도(集積度), 지역간의 관련성 등을 바탕으로 8개 지대로 분류하고 있는데, 김천은 영남내륙공업지대에 속한다.
이것은 공업화된 현재의 일이고, 우리나라가 공업화되기 이전에는 분류 조건이 단순하여 김천은 교통의 발달로 물산(특히 농산물)의 집산지로서의 도정(搗精), 농기구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지난날의 김천 공업을 일별하면, 일제시대에는 도정업, 유기, 담뱃대, 제과업을 들 수 있고, 광복후에는 농기구, 자물쇠 등을 들 수 있다.
일제 초기 “토매”로부터 시작한 기업도정에 일본인들이 큰 자본을 투자하여 중계인을 내세워 벼를 사들여서 도정하고 쌀로써 무역하였다. 일제 후반기부터 한국 사람도 도정업에 뛰어들었으나 일제말기에는 양곡의 궁핍으로 도정업은 중단되었다가 광복후 다시 성행하여 김천시․군에는 도정공장이 368개에 이르렀다.
도정공업의 발달로 이 지방에서는 생산자인 농민들이 쌀로 팔지 않고 벼(나락)로 도정공장에 파는 습관이 오늘에 이르고, 주곡의 시세도 이 곳에서는 살값이 얼마가 아니고 나락 한근에 얼마라고 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김천의 유기(鍮器) 공업은 황금동 국도변 일대가 거의 수공업 유기공장으로 수십개소가 연달아 있어 약물내기를 지날때에는 항상 수저와 그릇깎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김천의 유기는 전국에서 안성유기와 더불어 이름이 높았고, 김천지형에 관한 전설도 유기와 관련이 있을 만큼 유명했다.
일제시대 김천의 명물로 제과업을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이 김천에 정착하고 그들의 기호품인 생과자와 과자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자 한국 사람들은 엿으로 양과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과자의 원료인 주곡(主穀)과 사탕을 구할 수 없게 되어 일본인의 과자는 만들 수 없게 되고 한국 사람은 잡곡을 원료로 양과자를 만들어 삼남일대에 공급하였다. 광복후에도 수공업으로 양과자 만드는 집이 40여개소에 이르렀다.
광복후 김천에 두드러진 공업으로는 농기구 제조업이 전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