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프랑스의 대숙청
- 최초 등록일
- 2005.09.18
- 최종 저작일
- 2004.10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있었던 어마어마한 나치협력자 숙청 작업, 해방 이후 제대로 된 친일파 처단 작업이 없었던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른가?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비시정부는 조국을 배반했는가?
Ⅲ. 숙청의 과정
ⅰ) 정계
ⅱ) 공직자 사회
ⅲ) 경제계
ⅳ) 언론계
ⅴ) 출판계
ⅵ) 예술계
Ⅳ. 숙청이 필요했던 이유
Ⅴ. 맺는 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방을 맞이한 프랑스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 협력자들을 축출하는 작업이 초미의 과제로 떠오르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간에 살펴볼 프랑스 대숙청이다. 천재 작가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총살되었고, 르노자동차의 루이 르노 회장이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며, 민족주의 사상의 대부 모라스, 프랑스 최고급 식당 맥심 사장 등이 수감되었고, 당대 최고의 여배우 샤샤 귀트리는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연행됐다. 천재작가이든 대기업의 총수이든 유명한 여배우든 가리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가혹했던 프랑스 대숙청. 99만의 사람들이 나치협력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즉결처분 혹은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만 1만명에게 달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숙청. 그것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국제사회는 대대적인 숙청을 거친 프랑스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프랑스 숙청이 친일파들을 한 명도 응징하지 못한 우리나라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Ⅱ. 비시정부는 조국을 배반했는가?
드골의 숙청의 중심에 있던 것은 독일과의 정전협정을 맺은 후 수립된 제 3공화정 비시정부에 대한 숙청이었다. 비시정부에 대한 숙청을 이야기 하려면 ‘비시정부는 조국 프랑스를 배반했다.’라는 명제가 먼저 성립해야 한다. 비시정부는 조국을 배반했는가? 드골과 반나치 저항단체들이 비시정부의 전권들을 민족배반자로 규정한 반면 비시정부의 각료들은 자신들이 최악의 상태로부터 프랑스를 구해낸 방해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독일에 대한 협력이 프랑스의 보호와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비시정부의 독일협력체제는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수동적인’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비시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패전국의 입장에서, 휴전협정에 근거해서 소극적으로 수행했는가?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비시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넘어서 좀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에 나선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 정책이다.
참고 자료
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 중심, 1999
박지현,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책세상, 2004
로저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개마고원, 2001
콜린존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