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양화진, 절두산을 다녀와서. 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05.09.11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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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화진 외국인 묘지, 절두산을 다녀온후 쓴 감상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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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공강 시간을 이용하여 기독교와 현대사회 수업을 같이 듣는 나, 석원, 신우, 인녕, 그리도 다른 반 친구 종록, 이렇게 다섯 명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게 되었다. 지하철로 옆, 동네 주택가 한가운데 조용히 있는 그 곳 규모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 곳에 도착하고나서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묘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묘지공원은 헤론(John W. Heron, 1850 ~1890)이라는 미국 북장로 교회의 의료선교사이자, 고종의 시의였던 분이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1890년 7월 26일) 그의 장지가 최초로 묻힌 것에서부터 외국인묘지의 공원 터로서의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는 구미열강제국과의 사이에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쇄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외국인의 묘터로 쓰일 묘자리를 팔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법에 의해 성내에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 땅에서 사망하는 외국인은 1883년 제물포 항 해안 언덕에 최초로 마련된 외인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헤론 의사가 사망한 시기가 무더운 여름이어서, 시신을 그 먼 제물포 항까지 운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미국공사관과 조선조정의 신임을 받고있던 알렌이 어려운 교섭 끝에 양화진 언덕을 외국인 묘터로 사용토록 허가받아 그곳에 헤론의 시신을 처음으로 묻음으로써 오늘의 외국인묘지공원의 터를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외국인묘지공원은 그 이름이 일제때 경성구미인 묘지로 불리우다가 해방 후 서울 외국인 묘지로 바뀌었고 86년 선교기념관의 건립과 함께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된 것이다. 』 - 참조 : 양화진 외국인 묘지 안내판, 공식 홈페이지 소개란.
먼저, 공원에는 다수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여러 곳에 널려져 있었다. 우선, 교수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셨던 이름 없는 꼬마 아이의 묘비를 찾아 다녔다. 30분 정도를 찾아다녀도 결국엔 확실히 찾아내진 못하였다. 몇몇 비석들은 오래되어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었고, 비석들의 크기가 모두 달라 조그마한 돌이 박혀있어도 묘비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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