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 소설의 문학적 배경
- 최초 등록일
- 2005.06.12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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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덕 소설에 대하여..
목차
1. 전기적 고찰
2. 1930년대 후반 문단 상황과 작가적 위치
본문내용
1. 전기적 고찰
현덕은 문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진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과 관련된 자료는 물론 작품의 연보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최근 원종찬의 연구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기본적인 일차자료의 부족으로 그 행적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존재하기에 작가의 생애를 재구해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현덕(본명 玄敬允)은 1909년 2월 15일, 현동철과 전주 이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경성, 지금의 서울 삼청동 어느 별장에서 태어났다. '어느 별장에서 태어났다'라는 것을 보아 이때만 해도 그의 가정 형편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학에 입문하기 이전까지의 그의 대략적인 생애는 현덕 자신의 기록인 〈자서소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패가한 호화자제의 전형으로 사대주의적이고 투기적인 성품으로,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을 꿈꾸며 경향으로 돌고 가사에는 무심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집안 살림은 모친에 의해 겨우 유지되었고, 점차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식구들은 이집 저집 옮겨 살거나 각자 헤어져 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현덕은 조부나 당숙의 집으로 돌며 몸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당숙의 집인 인천 근해의 대부도(大 島)에서 보냈던 삼사 년의 소년시절이 그나마 행복했으며, 거기서의 이삼 년간이 제대로 받은 학교교육이었다고 술회한다. 현덕은 그 곳에서 보통학교 삼 년을 다니다가 상경해서 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거쳐 제일고보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사정에 의해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이전 현덕의 남의집살이 때부터 두드러졌던 성격상의 소심함은 제일고보를 중도에 그만 둔 후 염인증, 또는 칩거벽으로 심화되어 그는 병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 칩거벽의 일종으로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도서관에 들어앉아 있었다고 하면서, 무슨 얻음이 있었다면 이때가 전부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덕의 인생에서 이 시기가 문학을 접하게 된 첫 계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뜻한 바 있어 그때까지의 창백한 병적인 생활을 버리고 수원 근처 매립공사장에서 토공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 대판(大阪) 등지에서 신문 배달, 자유 노동, 페인트 공 등으로 전전했다. 그러던 중 그는 대판 기와회사에서 품을 팔러 갔다가, 흙바구니를 지지 못하고 쓰러지곤 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도저히 그대로 지탱해 갈 수 없는 허약한 몸임을 깨달으며, 그 "쓰여질 수 없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일로 그때까지 동경해오던 문학의 길을 밟아보겠다고 귀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기(知己) 김유정을 얻어 더욱 뜻을 굳혀 그 길을 밟던 중, 1938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남생이〉가 일등 당선됨으로써 나름대로 문학의 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에 입문하기 이전까지 겪었던 어려웠<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