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명말 농민반란의 배경
3. 이자성의 대두와 대순정권
4. 이자성 집단의 중요정책
5. 반란의 결과
6. 맺음말
본문내용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농민반란은 대개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난”과 “장헌충(長獻忠, 1606~1646)의 난”으로 대표되어 진다. 이 중에서도 아직까지 “이자성의 난”이 중시되어 온 것은 “이자성의 난”이 중국 역사상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자성의 난”이 명 왕조의 몰락에 직접적 계기를 제공하였고, 그 잔존 세력이 침입자인 만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띄는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명말 농민반란군의 잔여 세력이 이른바 남명정권(南明政權) 명조가 멸망하고 북경이 청군에게 점령당한 후 명의 유신들이 명의 황자들을 옹립하여 청조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든 정권
과 연합하여 복명운동(復明運動)을 지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명청 교체기에 일어났던 농민 반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자성의 난”의 성격을 고찰하여 명말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명말 농민반란의 배경
16세기 말엽에 들어오면, 명왕조의 지배체제는 중앙, 지방 양면에서 동요를 보이기 시작하고 임진왜란은 명왕조의 재정을 심각한 적자로 농민을 전쟁을 동원하여 막대한 물질적 부담을 강요하며 농민의 생활을 궁핍케 하였고 황제의 사치생활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더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동림당(東林黨) 당의 지도자 고헌성은 추원표 · 조남성 등과 함께 만력제(재위 1572~1620) 초에 장거정의 강압정치에 반대하였고, 장거정이 죽은 후에는 황태자 책봉문제와 인사문제에서 정부세력과 대립하다가 정계에서 추방당하였다. 이들은 1604년 향리인 강소성 무석에서 북송의 유학자 양시의 동림서원을 재건하고, 고반룡 등과 함께 강학을 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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