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한국의 언론사
- 최초 등록일
- 2005.01.20
- 최종 저작일
- 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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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일제기~ 미군정기 우리나라의 언론 현상(1910~1948)
1)무단 통치기 (1910~1919)
2) 민족지 활동기(1919~1940)
3)민족지 소멸기(1940~1945)
4) 미군정 시기(1945~1948)
3.시기별 신문들과 잡지
1)무단 통치기
2)민족지 활동기
3)미군정 시기
4. 주요신문과 그 논조
1)일제시대 여러 신문들의 논조(1910~1945)
2) 해방 후 정론지와 과도정부 하에서의 여러 신문의 논조
5. 결론
본문내용
광무 2년(1898) 9월 5일에 창간된 신문. 개신 유학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인 남궁 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로 운영하였다. 국한문혼용체이며, 지면 크기는 23視31㎝에 3단제를 쓰다가 34.5視25.2㎝의 4면 4단제를 썼고, 기사 배치는 다른 신문들과 비슷하게 논설․별보․관보․잡보․외보․광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주필로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이 활동하였다. 이 신문은 한문에 익숙한 중류 이상의 지식층에게는 국문만을 쓰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 하여, 국한문을 혼용했다.<황성신문>은 1900년 8월 8일자에 러시아 공사가 일본 공사에 한반도의 분할을 제의했으나 일본측이 거절했다는 뉴스를 보도하여, 필화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남궁억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신문의 보도가 문제되어 재판에까지 회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국적 논조로 한말 정국을 비판하여 사장 남궁억은 재임중 2번이나 구속되었으며 1902년 8월 이후는 장지연이 2대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주장하자 이의 부당성을 사설로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의 동인이 되었고, 또 구국민중대회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배일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두 번째 사장이 장지연이었는데 그 역시 1905년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쓰고 곧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이 논설에서 그는 보호조약에 서명한 대신을 돈견으로 매도하였다.<황성신문>은 뛰어난 논설로 명성을 얻었다. 장지연을 비롯하여 유은 박은식 등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인사들이 논설을 써 "논설의 황성"이라는 평판이 났다.
참고 자료
김민남 외, 『새로 쓰는 한국 언론사』, 아침, 1988
송건호 외, 『한국 언론 바로 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0
「한국 현대 언론사론」, 『언론과 사회』, 1983
조맹기, {한국언론사의 이해}, 서강대 출판사, 1997.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87.
김민환 『한국언론사』나남 출판사, 1999
두산 백과 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