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장원제
- 최초 등록일
- 2005.01.07
- 최종 저작일
-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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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중세 장원제도 개관
장원이란?
---봉건제에서 장원이 차지하던 위상
장원의 확
영주와 토지 보유농
의무부담의 고정화
인적관계의 변형
도시발달에 기인한 장원제의 변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중세 장원 제도(Manor system) 간략한 개관
장원의 구조는 영주 직영지, 농노 보유지, 공동지로 나누어졌다. 민가들을 중심으로 경작지 및 목초지, 황무지, 산림 등이 있다. 영주 소유의 직영지는 농민들이 경작해 주지만 장원청에 부속된 채원은 소작으로 대여된다. 3포에 각각 섞여 있는 농민 보유지 외에 목초지, 황무지, 산림 등은 공동 사용권이 있는 땅이다. 마을의 신부들을 위한 토지 역시 농민들이 경작하였다. 농경 방식에는 특이한 양상이 있었다. 장원 내의 모든 농경지는 울타리를 두르지 않은 채 광활하게 '개방된' 상태에 있었다. 우리 나라 농촌은 대부분의 경우 농경지에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별로 신기할 것이 없으나, 서양의 경우 근세 이래 개인의 농지는 울타리를 둘러쳤기 때문에 각별히 대비된다.
경작의 목적에서 농경지는 보통 추경지, 춘경지, 휴경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이는 농작물의 윤작을 하기 위함이었다. 윤작은 1차년에 밀이나 라이 맥, 2차년에 휴경, 3차년에 연맥이나 보리를 파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농민 보유지의 크기는 지역마다 상이하나 평균 30에이커이며, 각각 10에이커씩 3포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다시 밭갈이하기에 적절한 크기의 지조(strips)로 나뉘어져 있으며 3포지 전체에 걸쳐 경작지는 흩어져 있었다.
장원은 영주의 재산이며 그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농민측에서 보면 장원은 경제적 사회적 생활 터전이었다. 영주는 농민에게 경작할 토지를 주고, 농민은 그 대가를 공납과 노역으로 지불하였다. 양자의 관계는 관습법상 법적 효력을 갖는 관계였다. 영주는 농민들에게 제분소와 교회를 마련해 주고 재판을 실시하였다. 농지가 원래 영주의 땅이라 해도 정당한 사유 없이 농민 보유지를 빼앗지 못하였다. 농민들이 영주에게 이행해야 할 의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먼저 노역은 매주 2 3일 간의 정기적인 주역(week-work)이 있었다.
참고 자료
1.서명 : 봉건사회1.2. 저자 : 마르크 블로크 옮긴이: 한정숙 출판사: 한길사
(1권 545쪽~618쪽 제1장 장원, 제 2장 예속과 자유, 제 3장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를 향하여)
2.서명: 서양 중세사 강의 저자 : 강일휴, 곽정섭외 13인 출판사:도서출판 느티나무
(183쪽~189쪽 도시의 발전이 중세사회에 미친 영향)
3.서명: 서양의 장원제 저자 : 마르크 블로크 역자: 이기영 출판사 : 까치글방
4.서명: 유럽의 봉건제도 저자: 최재현 출판사: 역사비평사
5.서명 서양 중세 문명 저자: 자크르 고프 역자: 유희수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