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만식
- 최초 등록일
- 2004.12.16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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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조만식 선생의 생애(요약)
3. 일본유학시절 그리고 기독교적 민족교육의 선생
4. 물산장려운동과 관하여
5. 민립대학설립운동과 관련하여
6. 신간회 활동과 관련하여
7. 농촌진흥운동과 관련하여
8. 관서체육회창립과 조선일보를 통한 선생
9. 건국준비운동과 선생
10. 반탁운동과 관하여
11. 선생의 마지막
12. 맺음말
본문내용
한편 선생은 1930년에는 평양에 관서체육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이 되어 1년에 한 두 차례 대규모의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회는 평양시내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평양인의 긍지와 한국인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기여하였다. 일제시대의 체육활동은 건강을 넘어선 민족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민족운동가들은 한말 이래로 병식체조(兵式體操)를 중요시했으며, 일제시대의 체육행사는 한민족의 일체감을 갖게 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1932년 6월 50세에 <조선일보>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을 이끌었다. 이 당시 <조선일보>는 3·1운동 이후 <동아일보>와 더불어 항일 언론기관으로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한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 중일전쟁 이후 수많은 국내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가혹한 탄압과 회유로 지조를 잃어갔음에도 선생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황국신민화운동(皇國臣民化運動)의 추진기구인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고문직 수락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들의 학병입대 강요도 끝내 거부하였다. 이 암흑기시기에 그가 취할 길은 마치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 불복종"의 저항과 침묵의 거부밖에 없었다. 일제의 협조 강요에 견디다 못한 그는 해방 1년 전에는 고향으로 피신하여 은거함으로써 지조를 지켰다.
참고 자료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고당 조만식 회상록』, 조광출판, 1995.
·유병용 외 공저; 한국현대사연구회, 『한국현대사와 민족주의』, 집문당, 1996.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1998.
·『한국 독립운동과 종교활동』, 國學資料院, 2000.
·한국기독교사연구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Ⅱ』, 기독교문사, 1991.
·김성환,『한국사 천년을 만든 100인』, 오늘의책,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