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농민, 노비의 난(사료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4.12.13
- 최종 저작일
-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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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직접 작성했습니다 많은 도움 되길 바랍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 민란의 원인 - 정치적
경제적
- 무력항쟁의 시작 - 망이, 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김사미, 효심의 난
3. 나오며
본문내용
12세기의 귀족사회는 이자겸, 묘청의 난 등의 귀족 사이의 반란으로부터 붕괴되어 갔으며, 무신란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러한 귀족사회의 상층구조로부터의 붕괴는 고려 사회 유지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신분제도를 뒤흔들었으며, 하층부인 농민, 노비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신 정권기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전개된 시기로 볼 수 있다. 무신란 후에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계의 반항과 이와 연결된 사원 세력의 항쟁, 그리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인 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민과 노비의 봉기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들 농민과 노비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란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사료들을 통해 망이․망소이, 만적의 난으로 대표되는 노비의 난, 김사미, 효심 등으로 대표되는 농민의 난, 그리고 그 외의 난들을 무신정권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公州鳴鶴所民,亡伊,亡所伊等,嘯聚黨與,自稱山行兵馬使,攻陷公州,遣祗候蔡元富,郞將朴剛壽等,宣諭,賊,不從二月,召募壯士三千,命大將軍丁黃載,將軍張博仁等,討之.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의 백성 망이(亡伊)ㆍ망소이(亡所伊) 등이 도당을 불러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자칭하며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 박강수(朴剛壽) 등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적(賊)이 따르지 않았다. 2월에 장사(壯士) 3천 명을 불러 모으고, 대장군 정황재(丁黃載)ㆍ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6년 정월
참고 자료
․ 이병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고려 편」, 솔, 2002
․ 박용운, 「고려시대사(상)」, 일지사, 1985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청년사, 1997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