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 기술혁신
- 최초 등록일
- 2004.09.26
- 최종 저작일
-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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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중공업의 기술혁신에 관련된 회사의 내용에 대한 종류
오일 쇼크와 ꡐ현대상선ꡑ
이 글은 현대중공업 파업사태(1987년)에 즈음하여 지난 1987년 8월 9일,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과『한국경제신문』김병국 정경부장 사이에 이루어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목차
오일 쇼크와 ‘현대상선’
비웃을테면 비웃어라.
이 글은 현대중공업 파업사태(1987년)에 즈음하여 지난 1987년 8월 9일,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과『한국경제신문』김병국 정경부장 사이에 이루어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몇가지만 뽑아옴)
조직학습
본문내용
현대조선ꡑ이 행복한 콧노래를 불러도 되었던 것은 아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체득한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연속되는 시련과 싸우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1973년 10월, O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이 원유가를 17% 올리면서 세계 경제를 강타했다. 그러자 원당(原糖), 주석, 보크사이트, 아연, 면화, 소맥, 구리, 커피 등의 생산 국가들도 OPEC의 전투적인 방식을 따라 자원 무기화에 나섰고, 그에 따라 세계 경제는 급속히 침체되었다. 세계 경제의 침체는 국가간 교역 물량을 격감시켜 세계 해운업계에 최악의 불황을 가져왔다. 당연히 해운업계의 불황은 곧장 조선업으로 연결되는 법이다. 세계 조선업계는 1974년에 들어서면서 선복량(船腹量) 과잉에 빠졌다. 그 중에서도 1973년 말 현재 전체 선복량의 40%를 차지하던 탱커의 과잉이 가장 컸다. 오일 쇼크로 전세계 에너지 수입국들의 적극적인 유류 소비 억제 때문에 유류 에너지 물동량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75년 6월 5일을 기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페르시아 만에서 유럽까지의 왕복 운항 시간을 25일이나 단축시켜 줄어든 물동량을 더 더욱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더구나 7만t급 이상의 탱커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만t급 이상의 VLCC는 그야말로 완전 무용지물이 됐던 것이다. 그 결과 VLCC 건조에 총력을 기울였던 우리에게 밀어닥친 피해는 엄청났다.
ꡐ아세아상선ꡑ을 설립해서 해운업에 진출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 수입해서 쓰는 기름 수송권은 모두 외국 메이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수입해서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외국 선박 회사들이 이 수송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1천4백만 불을 요구했다. 우리한테 수송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자기네들이 보는 손실이 그만큼이라는 논리였다. 그야 자기네들 사정이지, 그리고 그 동안에는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서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쓴 것이지 이제부터는 우리 나라 배로 우리 나라 기름을 운반해다 쓰겠다는데, 그들이 입을 손해를 메꿔줘야 한다는 요구는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버텼다.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 불로 떨어졌다. 그래도 버텼다. 버티면서 계속 ꡐ우리가 쓰는 기름, 우리가 수송하겠다ꡑ는 주장을 계속했고, 결국에는 단 1전의 돈도 건네주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의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기름 운반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했던 ꡐ아세아상선ꡑ은 1979년에는 ꡐ1억 불 운임의 탑ꡑ상을 받고 1980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남미 항로를 개설하는 등 무럭무럭 잘 자라서 금년은 2조 6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ꡐ현대상선ꡑ이 되어 있다. 오일 쇼크 때문에 한동안 몹시도 나를 힘<<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한국경제의 신화와 현실/정주영
한국경제 이야기/정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