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청조의 한인 통치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유화책과 강압책
Ⅲ. 사상의 통제
Ⅳ. 옹정제의 한인 통치 정책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홍타이지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당시 명조는 부패하고 있었다. 환관이 관계(官界)를 장악하였고 관료 사이의 파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숭정(崇禎) 17년(1644), 이자성(李自成, 1606~1645)에 의해 북경(北京)이 함락되면서 중원은 무정부상태로 변모하였고, 오삼계(吳三桂, 1612~1678)가 이자성을 토벌하기 위해 산해관(山海關)을 열어 청군을 맞아들이면서 명 왕조가 이룩했던 제국은 청이 이어받게 되었다. 당시 청은 선대 황제인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가 돌연사하여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이 어린 순치제(順治帝, 1638~1661)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선대의 숙원을 이어받아 중원을 장악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고, 오삼계의 항복을 기회 삼아 산해관으로 진격하여 대순군을 격파시킨 후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손쉽게 북경을 점령한 그는 한인들을 안정화하고 남중국에 존재하는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남중국에는 대순군의 잔당 외에도 사천지역에 자리 잡은 장헌충(張献忠, 1606~1646)과 명의 유민, 유신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이 남경(南京)을 중심으로 건국한 것이 남명정권이다. 즉 남경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명 왕조의 후예를 명 황제로 옹립한 정권인 것이다. 남명정권은 1644년부터 1662년까지 지속되었다. 1662년 계왕(桂王) 주유랑(朱由榔, 1646~1662)이 오삼계에게 살해당한 후 육지에서의 청 왕조에 대한 저항은 사라졌다.
당시 청조가 장악한 북중국의 영토는 중원지역의 1/3에 불과했으며 사회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질서 확립을 위해 팔기군을 주둔시켜야 하였다. 그러나 북중국의 치안을 유지하면서 남중국을 정벌하기에는 팔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청조는 중원의 2/3에 달하는 남중국 정벌의 임무를 오삼계를 비롯한 한인 장수에게 맡겼으나 이민족인 그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기에는 불안하였다. 따라서 청조는 한인이 남명 세력을 진압하게 하고 팔기병은 한인의 반역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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