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문학] 낙하생(洛下生)이학규(李學逵)의 한시에 나타난 19세기 전반의 김해모습
- 최초 등록일
- 2004.07.21
- 최종 저작일
-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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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학기동안 열심히 자료를 참고하여 쓴 논문입니다.
낙하생 이학규의 논문자료는 찾기힘들어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좋은 참고가 되기를
목차
Ⅰ. 머리말
Ⅱ. 낙하생의 생애
1.가계
2.생평
Ⅲ. 시세계
1. 휼민의식
2. 민요풍의 한시
3. 방언의 시어적 활용
Ⅳ. 낙하생의 악부시와 김해
1. 악부시와 지역성
2. 김해의 지역 환경
3. 김해의 민속
Ⅴ. 맺음말
본문내용
낙하생의 경우 유례가 드문 24년에의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출신가계가 큰 요인이었음을 감안할 때 먼저 그의 가계와 사우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평창이씨인 낙하생가와 나주정씨인 다산가는 모두 남인계로서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 가문의 교유가 두터운 관계였다. 특히 낙하생은 다산을 척장(척장)이라 부르고 있다. 낙하생의 경우 배가 정재만여인바 곧 나주정씨이기 때문에 다산을 척장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본가의 경우 구촌숙인 이승훈(이승훈)의 배가 다산의 형제이며 다산의 장자 학연(학연)의 배가 또 팔촌 족조 동도(승훈의 부)의 여였던 점을 본다면 양가의 인척관계가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낙하생은 외가가 성호가(성호가)이며 유복자로서 소년시절을 주로 외조인 혜환 이용휴(이용휴)와 외숙인 금대(이가환)에게서 수학하며 그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지냈고 다산 역시 15세를 전후한 이른 시기에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학문에 대한 방향과 진로를 정했으며 나아가 성호계 즉 경세치용학파(경세치용학파)의 대를 이으면서 조선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것이다. 이를 보면 이학규와 다산가는 학파와 가문의 관계상 긴밀한 교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본적인 배경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보겠다.
참고 자료
백원철, 한국한문학 연구 제6집, 낙하생 이학규의 생애와 문학,
백원철, 落下生(李學逵)와 茶山(丁若鏞)의 同人的 結束과 實學文學의 展開 .논문집(26),1998,
백원철, 『낙하생 이학규의 생애와 문학』, 한국한문학연구 제6집
김은경,『낙하생의 한시와 현실주의-다산과의 교유를 주목하여』,1995.
박혜숙,『 이학규의 악부시와 김해 』한국시가연구 제6집 1998,
허경진,『낙하생 이학규 時選』평민사. 1998.
이상운 ,『한국어대사전』, 삼성문화사,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