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정곡
- 최초 등록일
- 2004.06.01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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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과정곡에 대한 발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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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책을 보고 작성했습니다^0^
모두 즐거운 하루~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정서와 그 시대상황
2) 명칭과 진작(眞勺)의 어원
3) 지은 장소 시기와 연모대상
4) 작품분석
5)몇 가지 문제들
Ⅲ. 결론
본문내용
1)정서와 그 시대상황
정과정의 작가 정서는 고명을 문 ,호를 과정이라 하였다. 그는 동래 정씨 시조 정지원 의 5대 손으로 그의 부 정 은 인종에게 크게 사라을 받던 중신으로 "고려사" 명신전에 그의 전기가 기재되어 있으며 벼슬이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정항은 4남 3녀를 두었으나 위로 3남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정서가 장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정서는 상국공 임원후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처형은 인종의 바로 공운태후가 되었으며, 태후의 아들 가운데는 장남이 의종, 3남이 명종,5남이 신종이 되었다. 따라서 인종은 정서와는 동서간이며, 의종, 명종, 신종 등의 그의 조카가 된다. 위에서 보듯이 정서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리하여 그는 음서로 인종 때 사성승동정이 되었고, 후에 내시랑중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의종 5년(1511)에 의종의 아우인 대령후와 사귀어 그 집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그 해 5월 25일 동래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의종의 몇 차례의 사면에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가, 의종 25년 8월에 정중부의 쿠테타에 의하여 의종이 밀려나고, 명종이 즉위한 해 10월에 20여년간의 귀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같이 오랜 세월동안 명문가 출신이며 의종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정서가 귀양에서 풀려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그가 귀양갈 때 의종은 그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귀양감은 조정 논의의 핍박 때문이니 가기만 가면 마땅히 소환할 것이다" 라 한 말이 있었다. 이는 의종을 둘러싼 권력투쟁과 관계가 있다. 곧 인종은 본디 5남 4녀를 두었고, 장자인 의종을 태자로 삼았으나, 차자인 대령후가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어 왕비인 공예태후는 그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시강이 극간하여 태자를 폐위하지 못하고 의종은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의종에게는 아우인 대령후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대상이 되었다. 왕위계승 과정에서 뼈아프게 겪은 열등감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보다도 도량이 넓어서 뭇사람의 마음을 얻고 있는 대령후의 상황이 의종으로 하여금 동생에 대한 의구심을 품계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령후의 모반한 정상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어머니 태후가 아직 생존해 있는데고 굳이 귀양보내 었으니 의종도 은혜가 적은 군주다"라고 한 기록에 의거에 본다면, 의종이 얼마나 대령후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위는 정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조의에 몰려서 할 수 없이 보내는 귀양이니 오래지 않아 불러 들이겠다던 자신이 말에 책임을 지려고 했거나, 정서를 구해주려는 의지가 있었고 공예태후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귀양지에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 參 考 文 獻 ☆
고려가요연구 박노준 1990 새문사
고려가요의 해석 최 철 1996 연세대출판부
정과정의 정서와 공간 이경희 1986 개문사
정과정과 소고 김쾌덕 1983 부산대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