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이 나아가야 할 길
- 최초 등록일
- 2022.09.09
- 최종 저작일
-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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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를 받은 중간고사 레포트입니다.
제주 4·3 연구소 이만열 교수의 <‘제주4·3’, 해방공간의 희생양> 논문을 전반적으로 바탕하고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개요와 전개에 대해 설명하고, 논문에서 제시된 문제점의 해결방안에 대해 제시하였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제주4·3사건 후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에게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봤을 때 보통 여행, 귤, 돌하르방 등을 대답할 것이다. 반대로 광주와 관련해서는 5·18민주화운동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둘 다 근현대에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4·3은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희미하게 기억되는 것 같다. <‘제주4·3’, 해방공간의 희생양>을 통하여 그와 관련한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 논의해보자.
우선 제주4·3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1945년 해방 후 국내에선 미군정과 여운형 등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대치하고 있었다. 제주도도 역시 미군과 제주 건준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후 국내에선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진행되는 한편, 1946년과 1947년 초에 걸쳐 제주도에는 미주둔군의 파견이 강화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제주도 내 학생들은 양과자 수입 반대 시위, 제주도 주둔 군정 중대에 대한 항의시위 등 미군에 비호적인 여론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쯤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냉전체제가 성립되어 갔는데, 미군정 또한 한국 내 공산주의 침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제주에서 ‘3·1사건’이 일어났다. 3·1운동 제28주년 기념대회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주도 아래 개최되었는데, 미군정 산하의 경찰들은 이 모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p.363 ~ p.367
이만열, ‘제주4·3’,해방공간의 희생양, 2018, p.26
제주특별차지도 도의회, 제주4·3에 대한 인식 및 해결과제에 대한 도민여론조사 결과보고서, 2017, p.44 ~ p.45
위의 보고서, p.71
위의 보고서, p.8
양유석, 제주4·3 서술의 과거와 현재, p.161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