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시대 향교의 의미연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교육적 측면의 향교
1. 진흥정책
2. 교육적 기능의 쇠퇴
Ⅲ. 사회 교화적 측면에서의 향교
1. 사회 교화적 측면의 기능
2. 교화와 풍속면의 효과
Ⅳ. 결 론
참고 문헌 (각주대체)
본문내용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책임자는 수령으로, 이들은 한 지방의 정치‧경제‧군사‧사법 등 모든 면을 담당했다. 이들은 중앙을 대신해서 그 지역을 잘 다스려야 했는데, 그 지침서적 역할을 한 것이 다수의 목민서라 할 수 있다. 목민서에는 주로 환곡‧전정‧군역의 삼정이 내용의 주를 이루지만, 그 외에도 ‘민의 교화’측면을 주목해 볼 수 있다. 교화와 관련해서는 ‘민의 교화’라는 직접적인 항목도 있었으나, 본 글에서는 ‘흥학교’ 조목 역시 교화에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사실 ‘흥학교’는 목민서 간행시기에만 강조되던 것은 아니었고, 태조의 즉위교서를 시작으로 조선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교육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후기로 갈수록 교육보다는 민의 교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향교의 목적이 왜 교육에서 교화의 측면으로 바뀌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향교가 민을 교화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향교와 관련해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 초‧중기의 연구는 이성무를 시작으로 주로 향교 교육의 제도적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후기의 경우 서원으로 인해 향교의 교육적 측면은 간과되었으며, 송찬식은 조선후기의 향교가 상징적 교화기관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이후 1980년대가 되면서 향교 소장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향교의 연혁‧운영‧기능에 대한 정리가 시작되었다. 각종 자료들의 발굴로 향교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의의는 있으나 지역적 편차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남아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 향교의 전체적 위상에 대해 규명하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후 1990년대에 이르면 지역의 특수성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며, 지역의 분포 면에서도 다양해져 편차를 극복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이성무, 「조선초기의 향교」, 『한파 이상옥박사 회갑기념 논문집』, 1970
이범직, 「조선전기의 교생신분」, 『한국사론』3, 1976
한동일, 「조선시대의 향교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성대논문집』 제 11집, 1971
송찬식, 「조선후기 교,원생고」 『국민대 논문집』 11, 1977
김호일, 「조선후기 향교조서보고-전라남?북도편」, 『한국사론』, 1983
김용덕, 「조선후기 향교연구-호남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1983
전경목, 「조선후기 교생의 신분에 관한 재검토」, 『송준호 교수 정년기념 논총』, 1987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경북향교 자료집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자료총서』, 1992
김양식, 「충북지역 향교 실태와 활성화 방향」, 『충북연구』, vol.2002 No.2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0쪽
김명우, 「조선시대의 향교교관-예우와 파견중단시기를 중심으로」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