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진흥왕의 정복사업(한강유역 진출과 창녕(대가야) 진출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진흥왕의 생애
3. 진흥왕의 정복사업
1)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2) 창녕(대가야)으로의 진출
4. 단양신라적성비
5.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6.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의의
7.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신라가 삼국전면에 등장한 것은 4세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맹왕국단계를 벗어난 국가체제는 6세기에 들어와 정비되었다. 이는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대를 거치며 지방제도, 율령, 불교공인 등 정치체제를 보완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연맹을 맺는 등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렇게 신라는 진흥왕(眞興王)대 최고 전성기를 맞으며 더 나아가 진흥왕의 정복사업이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신라를 이륙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본 발제문을 통해 신라의 정치, 외교, 문화를 크게 융성 시키고 최대 영토를 차지한 진흥왕의 정복사업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업적의 산물인 신라단양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와 진흥와의 4대 순수비 중 하나인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2, 진흥왕의 생애
신라 제 24대왕인 진흥왕은 7살인 540년 7월에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지소태후의 영향을 받아 국가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화랑(花郞)제도를 만들며 불교진흥에 힘써 흥륜사(興輪寺)와 황룡사(皇龍寺)를 포함한 4개의 절을 지었다. 진흥왕은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친 후에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지증왕과 법흥왕 때의 대내정책들을 완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정복국가로 발전하게끔 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소수림왕 때 대내적인 정비활동을 마치고,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정복국가로 나아간 것과 같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가야 연맹을 복속시키고 합병시켰으며, 또한 북으로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진흥왕은 자신의 업적을 후대에 남기고자 영토 곳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는데, 창녕비, 황초령비(黃草嶺碑), 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북한산비(北漢山碑)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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