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조선)] 19세기 전반의 국내정국과 사회혼란
- 최초 등록일
- 2003.10.14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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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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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국내정국
1) 정치
(1) 정치기강의 문란 - 세도정국(勢道靖國)의 성립
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②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
③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절정
(2) 정부의 대책 - 세도정권의 미봉책(彌縫策)
①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
② 삼정이정청 설치
③ 삼정이정청 추진의 실상과 한계
2) 사회·경제 - 삼정(三政)문란
① 전정(田政)
② 군정(軍政)
③ 환곡(還穀)
3) 사상
① 민간신앙(民間信仰)의 발생
② 천주교(天主敎)의 전파
③ 농민층(農民層)의 동학(東學)사상
④ 중인들의 개화사상(開化思想)
⑤ 유생들의 위정척사(爲政斥邪)
3. 사회혼란
1) 민란(民亂)과 변란(變亂)의 발생 배경 및 발발
(1) 인동에서 일어난 변란
(2) 단천과 북청의 민란
(3) 곡산 민란
(4) 홍경래의 난
(5) 진주 민란
(6) 광양 변란
(7) 이필제의 난
2) 민란의 의의
4. 결론
본문내용
1. 서론(緖論)
19세기 전반기는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전단하던 세도 정치 시대였다. 세도 정치의 특징은 왕권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권력이 하나의 문중(門中)이나 특정한 개인에게 이양되어 버린데 있다. 세도 정치는 그 이전, 즉 18세기 특히 그 후반기의 역사 전개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정치 체제라고 볼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당쟁(黨爭)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약간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조(英祖) 때에 와서 탕평책(蕩平策)이 거론된 것은 실질적으로 큰 효과가 없었다 하여도 붕당 중심의 정치 현상에 대한 반성내지 반발(反撥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출현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대두는 구세력에게 당쟁적인 차원이 아닌 새로운 위협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대한 일정한 긍정적인 자세와 수용 태세로서도 그러하였고 특히 토지 및 농촌 문제에 대한 이해와 상공업(商工業) 및 대외 무역(貿易)의 발전을 추구한 점에서도 그러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생각이 실현되는 경우 구세력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세력은 정조대(正祖代)와 순조대(純祖代)의 교체(交替)를 계기로 천주교 금압(禁壓)을 내세워 진보적인 정치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세도 정치 체제를 세워 나갔던 것이다.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진보적 정치 세력이 숙청되고 천주교가 탄압(彈壓)받고 소위 삼정문란(三政紊亂)이 매우 심해지면서 백성들은 다시 도탄(塗炭)에 빠져 들어갔다.
참고 자료
[한국사의 길잡이], 김무진, 혜안, 1998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1997
[한국[테마로 읽는 조선의 역사], 최완기, 느티나무, 2000
근대사 강의],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올아카데미, 1997
[조선시대 당쟁사2], 이성무, 동방미디어, 2000
[조선왕조사2],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8
[민란의 시대], 고성훈, 가람기획, 2000
[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32 (조선 후기의 정치)], 국사편찬 위원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