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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竹林七賢’의 존재
3. ‘竹林七賢’의 인물과 결성
4. 淸談과 竹林七賢
5.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竹林七賢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竹林七賢은 복잡했던 위•진시대의 정권 속에서 벗어나 在野에서 高談峻論을 나누며 교류한 일곱 명의 현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기존 지식과는 다르게 역사서 속에서 나타나는 그 일곱 명의 현자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묶기 힘들다. 그들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고, 정치적, 학문적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竹林七賢이란 기본적으로 ‘嵇康, 阮籍, 山濤, 向秀, 劉伶, 阮咸, 王戎’, 이렇게 일곱 명을 말한다. 이들 가운데 山濤와 王戎은 정치생활을 한다. 한편, 『晉書』『劉毅傳』에 ‘여섯 나라에 뛰어난 선비가 많았고 정시 연간에 풍류가 나왔다’라는 부분이 존재한다. 정시는 위나라의 연호로 240년부터 249년 사이를 지칭한다. 정시 십 년은 중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문화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쯤에 명사 문화가 등장했고, 명사 문화는 이전 한나라의 기록에는 큰 등장 내력이 없었지만 이때부터 문인사를 형성하는 등 영향력을 보였다. 이와 함께 명사 집단도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후대의 기록에 정시 명사라는 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시 명사의 핵심 인물은 何晏, 王弼, 夏侯玄이다. 이들은 모두 고관대작이었다. 이들과는 대조되는 죽림의 명사로 불린 竹林七賢은 앞의 집단과 마찬가지로 정시 연간에 만나 집단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출신도 그리 대단하지 못했고, 대부분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은거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후자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이들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竹林七賢’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Ⅱ. 竹林七賢의 존재
대부분 우리가 상식적인 선에서 알고 있는 위•진 현학의 주된 내용은 竹林七賢에 관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竹林七賢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위나라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세운 나라이고, 진나라는 사마의에 의해 기반이 만들어졌다.
사마씨에 의해 죽는 사람이 많던 이 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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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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