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배경에 따른 미술작품의 변화 양상 :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8.12.11
- 최종 저작일
-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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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789년 7월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같은 해 9월에 《인민의 벗 Ami du Peuple》지(紙)를 창간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주도하였던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의 암살사건은,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에 의해서 회화화(繪畵化)된 순간부터 수 세기에 걸쳐 수 많은 시선들에 의해 팔레트 위로 소환되었다. 다비드가 처음으로 <마라의 죽음>을 그린 이래로 수많은 작가들이 마라의 암살사건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들마다 처한 시대적,역사적 상황이 달랐으므로 <마라의 죽음> 역시 모두 다르게 그려졌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프랑스 혁명과 1793년
Ⅲ.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Ⅳ. 혁명 이후 작가들의 <마라의 죽음>
Ⅴ. 맺음말
본문내용
문득,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1인칭 시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무서워진다. 그들은 평등하게 단 하나의 ‘시선’을 가진다. 그 시선은 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국가, 사회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고로 그 시선은 개인의 창작물과 다름이 없고,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무수한 시선들에 의해 ‘관찰’당하고 ‘해석’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데올로기는 종종 다음 세대에 의해 비판을 받으며, 폭군으로 낙인찍혔던 군주가 그의 다른 면모들로 인해―대개 야사(野史)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긍정적으로 재조명된다. 같은 시대, 같은 국가에 태어나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고 해도 시선은 엇갈린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La Révolution Fraçaise)이 그러한 시선의 엇갈림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준다.
1789년 바스티유의 함락으로부터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까지를 프랑스 혁명기라고 본다면, 동시대를 공유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잔존하던 신분제에 의해서, 정치적인 입장 차이에 의해서―입헌군주정이냐 온건공화정이냐 급진공화정이냐―서로 연합하거나 대립했다. 프랑스 혁명의 全과정은 시선과 시선의 부딪힘이었고, 혁명을 이끌어나갔던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의 희비(喜悲)를 교차시켰다. 혁명이 일어난 같은 해 8월 26일에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제3신분에게 희망을 주었지만(비록 실제적 효용은 없는 추상적인 선언일 뿐이었으나), 루이16세와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국외 탈출 시도와,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내통 사건은 급진공화파인 자코뱅파(Jacobins)로 하여금 ‘입법의회’를 ‘국민공회’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나, 왕당파였던 푀이양파(Feuillants)와 온건 공화파였던 지롱드파(Girondins)에게는 단두대로 향하는 가파른 지름길이 되었다.
참고 자료
박화선,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혁명기 회화에 나타난 영웅의 죽음과 자유에의 열망」 미술사학보, 2006.
진중권, 『춤추는 죽음』, 세종서적,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