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여자 분석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8.10.18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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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조선시대 왕의 여자들에 대한 분석 보고서입니다.
폐비, 정식후궁, 미모의 여인들에 대한 종류별 내용을 구분하여 기술하였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경국대전의 법전의 맨 처음에 나오는 조항이 내명부(內命婦)이다. 내명부란 후궁과 궁녀 등 궁궐에 기거하는 여인들, 즉 왕의 여자들의 공식적인 위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내명부의 수장은 왕비로서 내명부에 들어있지 않다.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도 품계가 없는, 즉 품계를 초월한 위치에 있었다. 한 나라의 국모로서 또한 내명부의 수장으로 공적인 역할을 수해하는 왕비는 사인(私人)이 아니라 분명히 공인(公人)이었다.
이러한 왕비의 위치와 중요성 때문에 조선시대의 왕은 왕비를 선택할 때 간택제도를 통해 선발하였다. 간택제도는 조선시대에 한정되는 개념으로 고려 때만 하더라도 간택 제도는 없었고, 왕비나 세자빈을 구할 땐 상궁을 앞세워 중매를 하는 형태를 취했다. 간택제도가 시작된 것은 조선 태종 때 부터며, 정착된 것은 세종 때였다.
간택에 의해 궁으로 들어온 첫 여인은 양녕대군의 부인 김씨 였다. 재위 7년에 태조은 세자빈을 구하면서 신하들에게 세자와 비슷한 또래의 양가집 처녀의 단자를 올리도록 했고 그래서 간택된 여인이 김한로의 딸이었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중매의 성격이 더 컸다.
간택제도가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삼간택으로 바뀌게 된 때는 세종때이다. 세종은 세
자빈인 며느리 휘빈 김씨를 내쫓고 세자빈을 다시 간택하는 과정에서 간택 방법을 바꿀 것
을 제안했다. 이는 휘빈 김씨도 간택에 의해 뽑혔음을 의미하는데, 그 간택 방법이 잘못되
어 제대로 뽑지 못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세종의 제안은 이렇다 ‘동궁의 베필을 간
택 할 때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겠다. 집안과 덕성이 중요하긴 하나 이물이 아름답지 못
하면 또한 안 될 것이다. 나는 부모 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 하고 싶지만 옛법이 그렇지 못
하니 처녀들을 창덕궁에 모이게 하고, 내관과 시녀, 그리고 효령대군이 함께 참여하여 뽑도
록 하라’고 했다. 허나 이렇게 뽑혔던 순빈 봉씨도 폐비가 되고나니 세종은 며느리를 직접
뽑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재위 21년에 의창군을 장가 보낼 때 그 생각을 실해에
옮긴다. 세종에 의해서 시부모가 될 사람이 직접 며느리를 뽑는 형태가 정착된 것이다.
참고 자료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웅진지식하우스, 2008
윤정란, 조선의 왕비, 차림, 1999
최홍기 외, 조선 전기 가부장제와 여성, 아카넷,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