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세계 북송사업 서평
- 최초 등록일
- 2018.10.17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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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에 여러 이익집단
2. 일본의 대미종속의 시작
3.재일조선인 귀국사업에서의 미국의 역할
4. 일본의 선택, 미국의 압력?
참고문헌
본문내용
1959년 12월 14일 니가타(新潟) 항에서 출발한 이 사연 많은 소련선박은 뒤틀린 삶들을 실은 채 북한으로 향했다. 남한 이승만 정권의 공작, 서울에서 수십만의 반대시위, 미국의 침묵, 북한의 ‘열렬한 환호’ 등이 들어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남한이 고향인 재일조선인으로 어떤 이는 이데올로기를 찾아, 어떤 이는 지금과 다른 삶을 찾아, 어떤 이는 자신의 조국 조선(남한을 선택할 수 없기에 갈 수 밖에 없는 북한)을 찾아, 꿈을 찾아, 혹은 일본인이지만 조선인 남편을 사랑해 따라간 인물들이었다. 흔히 북송(北送) 혹은 귀국사업으로 규정된 이 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 9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50년대 초기 일본이 재일조선인을 ‘처분’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승만 정권과 교섭했으나 강건한 이승만 정권은 ‘일제시대의 수탈과 일본의 전쟁으로 생긴 난민이니 일본이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또 이들을 북한으로도 보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날 당시 1,128회 30만명의 사람이 북송 반대사업에 참여했고 북송이 끝날 때까지 약 3,000만 명이 참가했다. 여기에 12월 10일 일본 내 민단의 청년대원들은 철도노선에 누워 열차출발을 방해하려 했으나 뚜렷한 명분도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1959년 10월 건국10주년 김일성이 공식적으로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연설을 하고 이어 일본에 「귀국에 관한 요청서」를 보냈다. 이는 북한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미 1956년과 57년 50여명의 북송이 있었으며, 이시기 소련과의 다른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해 소련기술원조규모가 축소, 소련출신 파벌문제가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철수하지 않고 북한의 재건을 돕기 위해 남아있던 중국 ‘지원병’ 약 30만 명이 단계적으로 철수 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테사 모리스-스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