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report
- 최초 등록일
- 2018.04.13
- 최종 저작일
- 20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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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국채보상운동
2. IMF
3. 국채보상운동과 IMF
Ⅲ. 결론
본문내용
서론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 IMF가 어떠한 사건이었고 두 사건이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데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본론
1. 국채보상운동
먼저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아보겠다.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수호운동,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기 위한 운동이다. 당시 일제는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식민지 지배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한국에 차관을 맡기곤 했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체결 이후, 메가다 쇼타로가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더욱 거세어져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30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정부에 의한 국채보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경상북도 대구에 위치한 광문사의 김광제와 서상돈은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바와 같이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2,000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금연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광문사는 단연회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고, 서울에서 2월 22일 김성희, 유문상, 오영근 등의 주도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에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20여 개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전소는 서점, 약국, 대한매일신보사, 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고 4월에는 이 운동을 지도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 국채보상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설치되어, 계몽 활동과 직접 모금활동이라는 역할분담도 이루어졌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만이 아니라 참여계층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할 정도로 그 파급력이 컸다.
참고 자료
금모으기운동 http://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678644&memberNo=20361418
국채보상운동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5414&cid=46623&categoryId=46623
IM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6433&cid=43667&categoryId=43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