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논란 - 광복
- 최초 등록일
- 2017.07.22
- 최종 저작일
-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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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복 당시와 이후의 상황을 조사하고,
광복이후부터 2006년까지의 경제, 사회 변화상에 대한 통계 자료도 조사한 리포트입니다.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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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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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광복 직후의 사회상황
수년간의 일제강점에 의해 광복 직후의 국내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는 화폐유통, 식량사정, 실업문제, 행정업무문제, 인적자원의 숙련도문제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해결하는 것이 화두가 되었다. 하나하나 정리하면, 첫째로 화폐문제이다. 광복 후 국민경제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유통문제가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전적으로 일본인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 광복될 당시 조선은행의 화폐발행고는 49억7000여만 원이었는데 미군이 진주하기 전 일본에서 5억 원을 비행기로 운반해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서적주식회사로 하여금 천원권 70억 원, 백원권 21억 원을 인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과도하게 발행된 화폐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인들을 위해서 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후에 하늘 모르게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인플레이션의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아래에서 설명할 인적자원의 부재로 인한 생산성저하, 특히 남북 분단 후의 남한은 북에 비해 그 당시 주요 산업인 중화학 공업의 열악한 환경에 의해 국내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소매물가는 1945년 8월부터 1946년 사이에 10배로 뛰어 올랐으며 도매물가는 28배나 올랐다. 1인당 식비는 광복 전에는 월 평균 8원이었는데 1946년 9월에는 800원으로 올랐다. 1944년에 완전 고용된 업자가 1947년에는 노동인구 1천만명 중에 절반밖에 취업이 되지 못 하고 있었다. 설사 직업이 있다고 해도 임근이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식량사정이다. 소련군에 의해서 만주가 점령되자 만주산 잡곡 수입이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1944년의 흉작으로 이듬해 광복 후 9월과 10월 사이에 67만2000석의 식량부족이 예상되고 있었고, 일본의 패전으로 식량배급제도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거기에다 광복 후의 수송수단의 난맥상은 도시민의 식량사정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곡가의 앙등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서울과 부산 같은 큰 도시에서 더욱 심하였고, 기타의 지방도시들은 식량원산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덜하였다.
참고 자료
(자료 : 몽양 여운형선생 전집발간위원회(편), 몽양 여운형전집 2, 한울, 1993, 347쪽)
(자료 : 구글- 위키백과)
(자료 : 통계청 )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박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자료 : 국사교과서 - 교육 인적 자원부)
(자료 :구글 및 네이버 블로그)
(자료 : Seri- 삼성경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