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전한(前漢) 후기의 상황과 왕망의 개혁
- 최초 등록일
- 2017.03.10
- 최종 저작일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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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前漢 후기의 상황
1. 前漢 후기의 사회위기
2. 前漢 후기의 외척정권
3. 왕망집단의 형성
Ⅲ.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내정책
1. 관제와 지명의 제정
2. 화폐제도의 개혁
3. 토지·노비제도의 개혁
4. 五均과 六管制度
Ⅳ. 왕망의 개혁과 문제점 : 대외정책
Ⅴ. 왕망의 개혁평가
Ⅵ. 결론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王莽의 新왕조는 불과 15년 동안 존속한 단명의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禪讓에 의한 ‘왕조찬탈’과 復古정치를 표방하여 화폐제도, 토지와 노비제도, 五均과 六管제도, 관제와 지명의 변경 등 다방면에 걸친 무수히 많은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중국역사에서 오래도록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왕망의 왕조찬탈이 가능했었던 것은 前漢말의 시대적 상황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가 행하였던 개혁들이 실패하여 후세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 또한 여러 가지 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왕망정권이 강성했던 漢제국을 무너뜨리고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과 함께 그가 단행했던 개혁의 종류와 실패원인, 그의 정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Ⅱ. 前漢 후기의 상황
1. 前漢 후기의 사회위기
前漢 후기에는 멀게는 무제의 대원정, 가깝게는 황실의 사치, 대토지 소유와 가혹한 국가부담 등에 의해서 소농민층이 몰락하여 사회경제가 파탄의 상태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이 무제의 대원정에 의한 국가재정의 소진에 따른 영향이다. 문제에서 경제로 이어지는 황노정치에 의해 전한 초기에는 국가재정이 풍부해졌지만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가 대원정을 함으로써 풍부했던 국가재정을 소진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의 국가경제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으로는 무제 이후 호족들의 토지겸병과 재산 축적은 농민들을 압박하여 계속된 농민봉기 발생과 유민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가 통치를 하면서 잠시 안정되는 듯 했으나 원제ㆍ성제를 거치면서 대토지소유가 심화 되었다. 成帝는 倉廩이 텅비고 흉년ㆍ기근ㆍ질병ㆍ賦斂苛酷ㆍ酷吏姦行등의 책임을 물어 승상 薛宣을 면직 시키고 후임인 翟方進이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빈 땅에 전부를 부과하고 가축세, 소금ㆍ철기 가격의 인상 등 부세를 증가시켜 백성을 고갈시킨 것을 질책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성제시기에 사회경제가 얼마나 파탄에 빠졌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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