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16.11.30
- 최종 저작일
-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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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시열에 대해, 생애와 업적, 송시열이 조선을 올바로 세우려고 한 방법과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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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송시열의 생애와 업적
2. 송시열이 조선을 올바로 세우려고 한 방법과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3. 참고문헌
본문내용
명과 청이 교체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흔들리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올바로 세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리학적 기준을 가지고 조선의 흔들리는 기준을 안정시키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기준을 찾아 시험해보는 것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성리학적인 기준을 공고히 하는데 초점을 맞춘 주희가 완성한 남송시대의 기준을 조선 후기 사회의 기준 이념으로 제시한 송시열과 이들과 때로는 같고 다르면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 속에서 조선 사회가 갈 길은? 그럴 때 각각의 주장에는 무엇까지가 시대적인 명분이며 공적인 기준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개인적인 욕망을 위한 사심의 개입이었을까?
<중 략>
동시에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숭배와 비난을 아울러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이다.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에 속한 그는 공서파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참고 자료
정낙천, 『우암 송시열의 교육방법론』, 2011, 학술논문
심현수, 『송시열의 예학사상 고찰 : 시의적· 의리적 사고를 중심으로』, 2008, 학술논문
우경섭, 『우암 송시열 연구의 현황과 과제』, 2008, 학술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