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본 론 - 규장각의 정치적 기능과 초계문신제도를 중심으로
3. 결 론
본문내용
1. 서론
규장각이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정조의 즉위 직후인 1776년이지만, 그 시초는 거슬러 올라가 세조 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조 시기 양성지의 건의로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위시로 하여 이후 숙종이 규장각에 역대 국왕의 어필과 어제를 보관하려했으나 이 또한 성공적으로 이행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중기의 정치는 붕당간의 정쟁과 왕권 약화의 악순환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그 어떠한 정책적 시도도 노론과 소론에 의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조선 중기동안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던 규장각은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제 역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조는 기존의 정치 체계나 외교 정책에 있어 다소간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문화정책을 실시하려 했으며 그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된 기관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의 기본적인 기능은 앞서 밝혔듯 역대 국왕의 어필과 어제를 보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그 기능이 확대되어 기존의 승정원, 홍문관에서의 근시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 또한 주관하게 되었다. 특히, 상벌을 통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학문적인 수양을 끊임없이 유도했던 초계문신은 규장각의 가장 특징적인 기능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이렇듯 규장각이 단지 문화적인 목적인 서고나 시험을 주관하는 기능만을 행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히려 규장각의 초기 설립 목적 자체가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상당한 연관관계에 있었다는 의문점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자. 영조의 서거와 정조의 즉위를 전후로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기존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정치 이념이었던 주자학이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상태였고, 기존의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벗어난 외래 문물의 유입이 사회 전반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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