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호란 전의 정세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2) 조선과 후금의 교섭
3) 숭명정책과 중립양단외교
2. 정묘호란의 발발
1) 정묘호란의 발발배경
2) 정묘호란의 경과
3) 후금과의 강화시도
4) 강화성립
3. 의병의 활약
4. 정유재란으로 얻은 결과
1) 조선이 얻은 결과
2) 후금이 얻은 것
5. 인조를 위한 변명
본문내용
1. 호란 전의 정세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조선을 지원했던 명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누르하치(1559~1626)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면서 後金國을 건설하였다.
명대 여진은 建州, 海西, 野人 여진으로 나뉘고, 그 밑에 부락들이 있었다. 건주와 해서여진은 처음에 三姓(지금의 흑룡강성 依蘭縣 근처)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 ․ 하류 유역에서 동으로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살다가, 명대에 이르러 점차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건주여진의 한 갈래인 建州衛는 婆猪江 지류, 富爾江 상류의 五彌部(지금의 요녕성 桓仁縣)에 살다가 추장 李滿住의 인솔하에 渾河 상류 蘇子河 유역으로 옮겼고, 建州左衛가 건주위에 합류하였다.
명 말에 이르면 건주여진은 無順 이동의 혼하유역에서 동으로 장백산, 남으로 압록강에 뻗어 나갔다. 해서 여진은 계속 옮겨서 開原 변경 밖 輝發河 유역에서 송화강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야인여진은 건주 ․ 해서여진의 이동 ․ 이북인 송화강 하류지역에서 흑룡강지역, 그리고 동쪽으로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명정부는 여진족의 招撫를 중시하여 衛所를 두어 다스렸는데, 1410년에는 130개의 위소를 설치하였고, 여진족의 추장을 指揮使 ․ 千戶 ․ 鎭撫로 하면서, 이들 모두를 통괄할 奴兒干都指揮使司를 두었다. 이들 위소는 점점 늘어나 1447년에는 204개, 만력년간(1573~1619)에는 381개로 늘었다. 명정부는 중국역대왕조가 실시했던 羈縻策으로 여진족을 다스렸다. 즉 순종했던 여진족의 추장에게는 명의 황제가 직접 관직을 수여하였으며, 명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대군을 정벌하여 정벌을 행하였다.
여진족은 농업과 목축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무엇보다 즐겼던 것은 수렵과 채집(인삼, 진주, 각종 모피 등)이었다. 그들은 농산물, 축산물, 수렵, 수집품을 중국인과의 교역장소였던 馬市에 내다 팔면서 많은 은량, 철제농기구, 냄비, 웃옷, 대량의 소를 얻었다.
참고 자료
한명기, 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김종원, 1995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국방군사연구소, 1996 『한민족전쟁통사』
오수창, 2006 「오해 속 병자호란, 시대적 한계 앞의 인조」 『내일을 여는 역사』26,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