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레포트 조선대학교(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비교)
- 최초 등록일
- 2015.12.28
- 최종 저작일
- 20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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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2. 조선의 상황
3. 세계 정세와 명성황후의 개혁, 을미사변
4.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나의 평가
본문내용
역사란, 과거에서부터 현재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사실에 시대적 배경, 인물적 갈등을 통한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서로 같을 수도 달라질 수 도 있다. 여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수많은 역사가들이 이 때 발생했던 여러 사실적 사건들을 가지고 주관적 해석을 통한 인물평을 내놓다 보니, 지금까지도 역사가들의 논쟁이 발생하곤 한다. 원래는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잠깐 배웠었고, 대충 어떠하였다 라고만 알고 있던 이 내용을 이번 한국사 과제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조사하고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인물들을 평가하여 보기로 결정하였다.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정치를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 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 하면서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세도정치 [Politics by In·powers, 勢道政治]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