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 최초 등록일
- 2015.06.11
- 최종 저작일
-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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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기
2.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3. 버클리의 영향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버클리는 스피노자가 죽은 지 8년 후인 1685년에 태어났다. 그 당시 로크는 53세, 라이프니츠는 41세였다. 그리고 버클리가 15세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이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로크가 죽었을 때 그는 19세였고 라이프니츠가 죽었을 때 그는 31세였다. 그러므로 그가 철학교육을 받고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형성하던 시기에 영국과 대륙의 철학적 분위기는 그들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었다. 버클리가 26세 때 흄이 태어났고 칸트는 29세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1753년에 흄은 42세였고 칸트는 29세였다. 그러므로 버클리는 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 앞으로는 후기 데카르트 철학 세대와 뒤로는 흄과 칸트 사이의 과도기적 인물이다.버클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대부분의 삶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 출신이었으며 따라서 언제나 아일랜드 사람보다는 영국인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로크나 칸트와는 다르게 그러나 라이프니츠와 흄과는 유사하게 그는 아주 젊어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했다. 그것은 그가 불과 25세 때인 1710년에 발간된 《인간 지식의 원리》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후기 저서들에서도 그 견해를 크게 수정하지 않았다.그 후로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적 저술은 《세 가지 대화》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몇 편의 철학적 저술을 계속했다. 그러나 점차로 다른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자신이 이미 말한 것 이상으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논의될 것이 거의 없으며 그의 관심을 끄는 더욱더 실제적인 성격의 문제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대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종교적인 무신앙과 무신론의 조류를 막고 이것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옹호하는데 큰 관심을 가졌다.정통 종교를 지지하는 그의 이론의 정연함을 보면 그가 1734년에 영국 정교회의 주교가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로부터 약 20년 뒤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 클로인 교구의 주교로 지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주교로서 빈민들에의 경제적 여건이나 교육, 건강과 관련하여 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참고 자료
조지 버클리 저, 문성화 역,《인간 지식의 원리론》, 계명대학교출판부, 2010.
조지 버클리 저, 이재영 역,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이카넷,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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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지음, 《철학과 굴뚝청소부》, 새길, 1994.
R. 샤하트 지음, 정영기 최희봉 옮김,《근대철학사》, 서광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