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벌귀족 가문의 형성(남평문씨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5.05.11
- 최종 저작일
- 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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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남평문씨 시조설화와 개국공신
2. 남평문씨와 고려 문벌귀족
1) 중시조 경절공(敬節公) 諱 익(翼)
2) 귀족가문과의 통혼을 통한 중앙 진출
3)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4) 신흥문벌귀족으로서 정치적 활동
3. 고려 중대의 문벌귀족과 현재의 남평문씨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남평문씨는 시조설화와 시조 문다성의 벼슬 명을 통하여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시작이 되었으며, 초기에는 무(武)로써 고려개국(高麗開國) 공로를 인정 받았으며, 중시조 경절공(敬節公) 諱 익(翼)을 기점으로 무(武)에서 문(文)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문벌귀족으로 거듭 났으며, 특히 이시기 고려의 문벌 귀족과 신진 세력과의 통혼을 통한 남평문씨의 기틀을 다지는 시기가 되었다.
<중 략>
널리 전해오는 옛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購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博)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으로 받으셨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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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무신정권과 문극겸」,『실학사상연구』10 ․ 11, 무안실학회, 1999
박용운,『고려시대사』, 일지사, 1988
「고려전기 문반과 무반의 신분문제고려 귀족가문 연구(3)」, 『한국사연구』21, 한국사연구회, 1978
남평문씨 대종회(http://www.m-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