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제회 (拜上帝會)
- 최초 등록일
- 2015.04.17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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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홍수전(洪秀全)의 성장과 정유이몽(丁酉異夢)
2. 배상제회의 설립과 성장
3. 금전촌(金田村)의 봉기와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의 시작
4. 배상제회의 교서
5. 참고문헌
본문내용
홍수전은 1814년(가경 17) 1월 11일 광동(廣東) 화현(花縣) 관록포(官祿垉)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객가(客家) 신분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했다. 그는 7세에 사숙(私塾)에 들어가 독서했으며 총민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1827년 14세에 현시(顯試)에 합격했지만 광주(廣州)에서의 원시(院試)에는 낙방해 생원(生員)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16세에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하게 되어 집의 농사일을 돕거나 산이나 들판에서 소를 돌보았다. 18세에는 마을과 부근 향촌 사숙의 교사로 초빙받기도 했다. 홍수전은 어릴 때부터 농촌에서 성장하며 농사도 지었고 생활의 어려움도 겪어 봤기 때문에 농민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서 비교적 많이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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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 풍운산(馮雲山,1822~1852)과 함께 주구주(朱九疇)가 설립한 상제회(上帝會)에 들어갔다. 원래 이 모임은 표면상으로는 전교(傳敎)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명나라의 부활을 모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에 주구주가 죽자, 그가 상제회의 주교로 추대되어 종산(種山)의 숯쟁이 출신 양수청(楊秀淸,1821~1856), 이수성(李秀成,1823?~1864) 등과 함께 『권세양언』을 연구해서 그들의 종교적 열의를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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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왕 파괴 사건으로 배상제회의 명성이 널리 펴지게 된다. 회원들은 도처에서 묘우우상(廟宇偶像)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지주들은 두려워했다. 지주와 신사(紳士)들은 배상제회가 결맹해 무리를 모아 청조의 법률을 따르지 않고 사직과 신명을 짓밟는다고 주장했다. 이윽고 1848년 1월, 계평현 지주의 지도자 왕작신(王作新)이 단련(團練)을 조직해 풍운산 등을 체포하기 에 이른다. 홍수전은 소식을 듣고 광주로 가서 구제책을 강구하려 했다. 이 때문에 배상제회는 순간 지도층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 양수청이 천부가 자신에게 내려왔다고 가탁해 인심을 안정시켰다. 빈농 출신 소조귀(蕭朝貴) 역시 천형 야소가 자신에게 내려왔다고 가탁했다. 다른 상황 같았으면 홍수전은 이들 자신의 신성함을 잠식하는 자로 파악, 배척해야 했으나 당시 배상제회는 종교적인 흥분 상태였고 상황이 곤궁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언행을 승인하고 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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