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성호사설
- 최초 등록일
- 2015.04.03
- 최종 저작일
- 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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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성호 이익의 생애
2. 시대적 상황
3. 성호사설의 구성과 그 내용
(1) 정치개혁론
(2) 토지개혁론
(3) 관료제도개혁론
(4) 과학 기술관
(5) 우주관의 변화
(6) 역사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성호 이익의 생애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그는 집안은 몰락한 남인(南人) 출신으로 그의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고, 조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부친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까지 지낸 명문가였으나 숙종 6년(1680)에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때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평안북도 운산현(雲山縣)으로 유배되었는데, 1681년 10월 이익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음해에 부친이 유배지에서 죽었으므로, 그 일가는 고향인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돌아왔고, 여기서 편모슬하로 자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중형(仲兄)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워서 유학을 접하였고, 유달리 총명하여 문장을 잘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25세에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이듬해 진사(進仕)였던 형이 장희빈을 변호하고 노론(老論)을 공격하는 상소(疏)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장살(丈殺)로 죽게 되자 그 충격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임하(林下)에 묻혀 오직 학문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집에는 이하진이 1678년 사신으로 중국의 연경에 갔을 때 사온 많은 서적들이 있었다. 관직에 나아갈 것을 단념한 그는 이 서적들을 통하여 학문만을 닦음으로써, 곧 대학자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많은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게 되었다. 엄중한 도학자였던 그는 옛 경전과 정주학(程朱學)은 물론 국내의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그리고 유형원(柳馨遠) 등의 학문에도 정통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학자로서 평생을 농민 곁에서 살았던 그는 농민들이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호구조차 하기 어려운 현실에 마음을 아파하였으며, 조상이 남겨준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에 항상 겸허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들이 그로 하여금 실학자의 길을 걷게 만든 배경이다.
그가 47세(영조 3년) 되던 해, 그의 학행(學行)을 높이 산 조정에서 선공감(繕工監)의 가감역(假監役)이라는 벼슬을 내렸지만 역시 사양함으로써 끝내 야인으로 평생을 마쳤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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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연구회 지음,《한국 실학 사상사》, 다운샘, 2002.
조현규 저, 《한국의 윤리사상》, 중문, 200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7.
황광욱, 정성식, 임선영 저, 《한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동녘, 2007.